인문학/선방일기 15

선방일기 / 화두

1973년 11월 25일달포가 지나니 선객의 우열이 드러났다. 선객은 화두(話頭)와 함께 살아간다. 화두란 참선할 때 정신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붙드는 하나의 공안인데 철학의 명제(命題), 논리학의 제재(題材)라고 말할 수 있다. 화두는 처음 선방에 입방할 때 조실스님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그 종류가 무한량이다. 흔히들 세상에 화두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많은 화두 가운데서 자기에게 필요한 화두는 단 하나이다. 단 하나일 때 비로소 화두라는 결론이다대부분의 선객들이 붙드는 화두는 시심마(是甚麽 : 이게 무엇이냐.)이다. 예로부터 경상도 출신의 스님들이 가장 많아서 강원도 절간에서도 경상도 사투리가 판을 친다. 그래서 시심마가 불교에서는 '이 뭐꼬'로 통한다화두는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선방일기 / 식욕의 배리(背理)

1973년 11월 23일겨울철에 구워먹는 상원사의 감자맛은 일미(逸味)다. 선객의 위 사정이 가난한 탓도 있겠지만 장안 갑부라도 싫어할 리 없는 맛이 있다. 요 며칠 전부터의 일이다. 군불을 지핀 아궁이에 꽃불이 죽고 알불만 남으면 고방에서 감자를 몇 됫박 훔쳐다가 아궁이에 넣고 재로 덮어 버린다. 저녁에 방선(放禪)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 감자구이 담당스님이 아궁이로 감자를 꺼내러 간다. 뒷방에서는 공모자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기다린다. 감자는 아궁이에서 몇 시간 동안 잿불에 뜨뜻하게 잘 구워졌다. 새까만 껍질을 벗기면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맛은 틀림없이 삶은 밤 맛이다. 서너 개 먹으면 허기가 쫓겨 간다. 잘 벗겨 먹지만 그래도 입언저리가 새까맣다. 서로를 보며 웃는다. 스릴도 있고 위의 사정도..

선방일기 / 올깨끼와 늦깨끼

1973년 11월 29일조실스님 시자는 열여섯 살이요, 주지스님 시자는 열아홉 살이다. 스무 살 미만의 스님은 이들 두 사람뿐이다. 나이도 어리지만 나이에 비해 체구도 작은 편이어서 꼬마 스님들로 통한다. 조실스님 시자가 작은 꼬마요, 주지스님 시자가 큰 꼬마다. 작은ㅜ꼬마스님은 다섯 살 때 날품팔이 양친이 죽자 이웃 불교 신도가 절에 데려다주어서 절밥을 먹게 되었고, 큰 꼬마스님은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동해안의 낙산보육원 출신이다. 낙산보육원에서 간신히 중학을 마치고 곧장 절밥을 먹었다고 한다. 모두가 고아다. 작은 꼬마는 절밥을 12년 먹었고, 큰 꼬마는 4년째 먹는다. 꼬마스님들은 대중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측은해서도 그렇고 가상해서도 그렇다.그런데 꼬마스님들의 사이는 여름 날씨 같은 것이어서 변..

선방일기 / 본능과 선객

1973년 11월 15일상원사의 동짓달은 매섭게 차갑다. 앞산과 뒷산 때문에 밤도 무척이나 길다. 불을 밝히고 먹는 희멀건 아침죽이 꿀맛이다.오후 다섯 시에 먹은 저녁은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소화가 되어 위의 기능이 정지 상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상원사 김치가 짜냐? 주안 염전의 소금이 짜냐?"라고 물을 정도로 상원사 김치는 짜기로 유명하다. 그런 김치를 식욕이 왕성한 젊은 스님들은 나물 먹듯이 먹는다. 식욕을 달래기 위해서다. 하기야 상원사 골짜기의 물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으니까 염도를 용해시킬 물은 걱정 없지만. 선객에게 화두 다음으로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식사(食思, 먹는생각)다.출가인은 욕망의 단절상태에 있지 않고 외면 내지는 유보상태에 있을 뿐이라고 이 식욕은 강력..

선방일기 / 유물과 유심의 논쟁

1973년 11월 7일견성은 육체적인 자학에서만 가능할까. 가끔 생각해 보는 문제다.우리 대중 가운데 특이한 방법으로 정진하는 스님들이 있다. 흔히들 선객을 괴객(怪客)이라고 하는데, 이 괴객들이 다시 괴객이라고 부르는 스님들이 있다.처음 방부받을 때 논란의 대상이 된 스님은 명등(明燈)스님이다. 이 스님은 생식을 하기 때문이다. 시비와 논란의 우여곡절 끝에 방부가 결정되어 공양 시간에 뒷방에서 생식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래서 간편한 소임인 명등이 주어졌다.수두(水頭)스님은 일종식(하루에 한 끼만 먹음)을 하고 원두스님은 오후불식을 한다. 그리고 간병(看病)스님은 장좌불와(눕지 않고 수면도 앉아서 취함)를 한다. 욕두(浴頭) 스님은 묵언을 취한다. 개구성(開口聲)이란 기침뿐이다. 일체의 의사는 종이에 글을..

선방일기 / 선방의 풍속

1973년 11월 3일선방의 역사는 뒷방에서 이루어진다. 뒷방의 생리를 살펴보자.큰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길다랗게 놓인 방이 뒷방(혹은 지대방)이다. 일종의 휴게실이다. 개인 장구가 들어 있는 바랑이 선반위에 줄줄이 담을 쌓고 있어서 누구나가 드나든다. 휴게시간이면 끼리끼리 모여앉아 법답을 주고받기도 하고 잡담도 한다. 길게 드러누워 결가부좌에서 오는 하체의 피로를 풀기도 하고 요가도 한다.간병실과 겸하고 있어 병기가 있으면 치료도 한다. 웃을 꿰매는가 하면 불서를 보기도 한다.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일기도 쓴다. 어느 선방이거나 큰방 조실이 있음과 동시에 뒷방 조실이 있다. 큰방 조실은 법력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병기(病氣)와 구변(口辯)이 결정짓는다. 큰방에서 선방의 정사가 이루어진다면 뒷방..

선방일기 / 포살

1973년 10월 30일그믐이다. 삭발하고 목욕하고 세탁하는 날이다. 보름과 그믐에는 불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날 이기 때문에 세탁을 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내복을 입어야 하고 내복에는 이 따위가 있기 때문에 세탁을 하면 살생을 하는 결과가 된다.겨울철 목욕탕과 세탁장 시설이 협소하니 노스님들에게 양보하고 젊은 스님들은 개울로 나가 얼음을 깨고 세탁을 하고 목욕은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손질하는 짓으로 끝낸다.날카롭게 번쩍이는 삭도(削刀)가 두개골을 종횡으로 누비는 것을 바라볼 때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내 머리카락이 쓱쓱 밀려 내릴 때는 시원하고 상쾌하다. 바라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 때문이다.오후에는 유나(維那)스님의 포살이 행해진다. 삼장(三藏, 經·律·論)중에서 율장(律藏)을 다룬다. 사분율의(四分..

선방일기 / 선객의 운명

1973년 10월 25일선방에 전래되는 생활규범이 있으니 그것은 두량 족난 복8분(頭凉 足煖 腹八分)이다.(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듯하게, 배는 만복(滿腹) 에서 이분(二分)이 모자라는 팔분) 의식주의 간소한 생활을 표현한 극치이다.선방에는 이불이 없다. 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으로 발만 덮고 잠을 잔다. 그래서 선객의 요품(要品)중의 하나가 바로 방석이다. 옮겨 다닐 때에는 바랑에 넣어가지고 다닌다.선방의 하루 급식량은 주식이 일인당 세 홉이다. 아침에는 조죽(朝粥)이라 하여 죽을 먹고 점심에는 오공(午供)이라 하여 쌀밥을 먹고 저녁에는 약석(藥石)이라 하여 잡곡밥을 약간 먹는다. 부식은 채소류가 위주고 가끔 특식으로 두부와 김과 미역을 보름달 보듯 맛볼 수있다.선객이 일 년에 소비하는 물적인 소요..

선방일기 / 선방의 생태

1973년 10월 29일이번 선방의 구성원은 극히 복합적이다. 이질성과 다양성이 매우 뚜렷하다. 먼저 연령을 살펴보면 16세의 홍안(紅顔)으로부터 고희(古稀)의 노안(老顔)에까지 이른다. 세대적으로 격(隔)이 3대에 이른다. 물론 세수(世壽)와 법랍(法臘)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다음에 출신 고장을 살펴보면 팔도 출신들이 제각기 제고장의 독특한 방언을 잊지 않고 수구초심(首丘初心)에 가끔 젖는다. 북방 출신들은 대부분 노장년층이다.학력별로 살퍼보면 사회적인 학력에서는 교문을 밟아보지 못했는가 하면, 대학원 출신까지 있다. 불교적인 학력(講院學習)에서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도 이수치 않았는가 하면 대교(大敎)를 마치고 경장(經藏)에 통달한 대가(大家)도 있다.다음으로 출신 문벌로 보면 재상가(宰相家..

선방일기 / 소임

1973년 10월 15일삼동결제(三冬結制)에 임하는 대중이 36명이다. 조공(아침공양)이 끝나자 공사가 열렸고 결제방이 짜여졌다. 결제방이란 결제 기간에 각자가 맡은 소임이다.36명의 대중을 소임별로 적어보면조실(祖室) 1명 - 산문(山門)의 총사격(總師格)으 로 선리(禪理) 강화 및 참선지도유나(維那) 1명 - 포살(戒行과 律儀) 담당병법(秉法) 1명 - 제반시식(諸般施食) 담당입승(立繩) 1명 - 대중(大衆) 통솔주지(住持) 1명 - 사무총괄(寺務總括)원주(院主) 1명 - 사중(寺中) 살림살이 담당지전(知殿) 3명 - 전각의 불공(佛供) 담당지객(知客) 1명 - 손님 안내시자(侍者) 2명 - 조실 및 주지 시봉다각(茶角) 2명 - 차(茶) 담당명등(明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