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선방일기

선방일기 / 소임

나는... 누구인가? 2024. 6. 10. 16:09

1973년 10월 15일

삼동결제(三冬結制)에 임하는 대중이 36명이다. 조공(아침공양)이 끝나자 공사가 열렸고 결제방이 짜여졌다. 결제방이란 결제 기간에 각자가 맡은 소임이다.

36명의 대중을 소임별로 적어보면
조실(祖室) 1명 - 산문(山門)의 총사격(總師格)으
                           로 선리(禪理) 강화 및 참선지도
유나(維那) 1명 - 포살(戒行과 律儀) 담당
병법(秉法) 1명 - 제반시식(諸般施食) 담당
입승(立繩) 1명 - 대중(大衆) 통솔
주지(住持) 1명 - 사무총괄(寺務總括)
원주(院主) 1명 - 사중(寺中) 살림살이 담당
지전(知殿) 3명 - 전각의 불공(佛供) 담당
지객(知客) 1명 - 손님 안내
시자(侍者) 2명 - 조실 및 주지 시봉
다각(茶角) 2명 - 차(茶) 담당
명등(明燈) 1명 - 등화(燈火) 담당
종두(鐘頭) 1명 - 타종(打鍾) 담당
헌식(獻食) 1명 - 귀객식물(鬼客食物) 담당
원두(園頭) 2명 - 채소밭 담당
화대(火臺) 2명 - 화력 관리(군불때기)
수두(水頭) 2명 - 식수 관리
욕두(浴頭) 2명 - 목욕탕 관리
간병(看病) 1명 - 환자 간호
별좌(別座) 1명 - 후원(後園) 관리
서기(書記) 1명 - 사무서류 담당
공사(供司) 2명 - 공양(供養, 主食) 담당
채두(菜頭) 2명 - 부식(副食) 담당
부목(負木) 4명 - 신탄(薪炭, 땔감) 담당
소지(掃地) 모두 - 청소

나의 소임은 부목이다. 소임에 대한 불만도 없지만 그렇다고 만족도 없다. 단체생활이 강요하는 질서와 규율 때문이다.
결재 불공이 끝나고 조실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물질의 형태에서 보면 영원성은 부정되고 물질의 본성에서 보면 영원성이 긍정된다. 영원성을 부인함은 인간의 한계상황 때문이요, 영원성을 시인함은 인간의 가능상황 때문이다. 영원성을 불신함은 중생의 고집 때문이요, 영원성을 확신함은 불타(佛陀)의 열반(涅槃)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성을 배제하고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저 눈 속에서 탄생의 기쁨을 위해 조용히 배자(胚子)를 어루만지는 동물처럼, 얼어붙은 땅속에서 배아(胚芽)를 키우는 식물처럼 우리도 이 삼동에 불성을 계발하여 초춘(初春)엔 기필고 견성하도록 하자. 끝내 불성은 나의 안에 있으면서 영원할 뿐이다."
법문의 요지였다. 법문을 하는 스님이나 듣는 스님들이나 견성을 위해 이번 삼동에는 백척간두에 서서 진일보하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충만해 있다.
다혈질인 몇몇 스님들은 이를 악물면서 주먹을 굳게 쥐기도 했다. 법문이 끝나고 차담이 주어지면서 입송스님에 의해 시간표가 게시되었다.

2시 30분       기침
3시~6시       참선
6시~8시       청소, 조공(아침공양), 휴게
8시~11시     참선
11시~1시     오공(점심공양), 휴게
1시~4시       참선
4시~6시       약석(저녁공양), 휴게
6시~9시       참선
9시                취침

• 단 망회일(妄晦日)에는 오전에 포살(布薩, 죄를
   참회하는 의식)이 있음.

오후 1시가 되자, 시간표에 의해 동안거의 첫 입선(入禪)을 알리는 죽비 소리가 큰방을 울렸다.
각기 벽을 향해 결가부좌(結跏趺座)를 취했다. 고요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이삼동에 견성하겠다는 소이에서 일까. 외양은 문자 그대로 면벽불(面壁佛) 처럼 미동도 없다. 그러나 그 내양은 어떠할까. 무장하고 출진하는 무사와 같다.
우열은 전쟁터에서 용장과 패장으로 구분되듯이 시간이 지나야 각자의 자량과 분수가 노출되면서 공부가 익어가는 모습이 비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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