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노자와 장자 15

창의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창의는 익숙함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까닭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이다.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님어가는 일이리면, 그것은 철저한 탐험의 결과다. 장자의 '박 배'도 장자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아니라, 그의 탐험 정신이 만들어냈다. 그 탐험 정신은 장자를 여기서 저기로 성큼 건너가게 ..

시선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의식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의식을 생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생각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정한 높이에서 작동할 때 그것을 또 시선이라고 부른다.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는 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면서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인간이 삶을 꾸리는 세계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개의 무대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장된 스스로의 법칙을 따르는 저절로(自) 그러한(然) 세계고, 문명은 인간이 그려 넣은(文) 세계다. 인간이 그린 세계를 문명이라고 할 때, 그것을 존 더 구체격으로 말하면 인간이 의도를 개입시켜 제조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을 제조하는 의도를 의지나 의욕, 욕망 혹은 영혼 등등으로 다양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통괄하여 일단 '생각'이라고 하자. 그래서 각자 누리는 문명의 수준이나 내용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에 좌우된다. 이라는 책에서는 이것을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당연히 앞선 문명은 앞선 생각이 만..

지치지 않는 인간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심리학자 자이가르닉(Zeigarnik)은 단골 식당에서 식사할 때면 종업원이 여러 사람에게서 주문을 받는데도, 서빙을 할 때 거의 착오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종업원에게 어떤 능력이 있기에 주문을 잊지 않고 정확하게 서빙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나온 종업원에게 물어봤다.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나요?" 그런데 종업원은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종업원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완결된 것에는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다. 완결되지 않은 것에만 호기심을 가진다. 식당 종업원은 자신의 임무가 완결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기억해야 할 주문을 전부기억한다. 하지만 완결된 후에는 잊어버린다. 이 같은 관찰 결과를 자이가르닉은 하나의 ..

영감을 맞이하기 위해서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장자의 부인이 죽었다. 장자의 친구 혜시(惠施)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는데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혜시가 말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할 만한데, 어떻게 노래까지 할 수 있나?" 장자가 말했다. "나라고 해서 왜 슬프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근원을 따져 보니 아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거야. 내가 축복해 주는 게 맞아." 보통 사람들은 아내가 죽으면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내가 죽으면 슬퍼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일관하던 사람들은 누가 더 눈물을 많이 흘리느냐, 누가 더 슬퍼하느냐를 따진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있는 틀에 빠져 있을 때 장자는 찰기시(察其始) 즉..

뉴턴의 사과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영감은 예감과 비슷하다. 앞으로 펼쳐질 나의 세계를 미리 보는 느낌이며 앞으로 펼처질 나의 세계를 미리 출발시키는 시발점이다. 영감은 미래에서 미리 나에게 와준 느낌이기에 이미 있는 이해의 틀로는 다르룰 수 없다. 신비롭다. 우리는 영감을 통해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영감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과거의 시간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영감을 맞이할 수 있을까? 모든 창의적 결과는 영감의 결과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혹시 영감이 형체를 띠고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인류 문명은 창의적인 활동으로만 진화하기 때문이다. 진화는 창의의 중첩이다. 스마트폰도 창의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없던 것이 현실로 등장할 때는 아직 어떤 해석도 가해질 수..

영감이 피어나는 순간에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나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1학년 때까지는 멀쩡했다. 그런데 2학년 올라가면서부터 공부를 안 하게 되었다. 학생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나는 공부를 하는 대신에 공부하는 내 모습을 관찰하였다. 공부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왜 공부를 할까?' '나는 왜 공부를 하지?' 그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졌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은 왕왕 질문한 자를 혼란에 빠트린다. 나는 공부에 대해서 궁금해하다가 공부를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이 갈 곳은 철학과밖에 없었다. 공부를 못하게 된 이유를 좀 과하게 미화한 느낌도 든다. 사실은 그냥 게으름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플라톤, 노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면서 그들을 공부하는 나는 누구이며,..

개념화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문자가 문화적인 높이에서 작동활 때 나오는 중요한 점은 개념 제조 능력, 즉 '개념화' 능력이다. 문자적인 높이에 있는 사람은 '개념화'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개념화'의 결과인 '개념'을 수용한다. '개념화'는 인간이 세계를 전술적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다루는 일이다. '개념화'는 바로 세계를 장악하는 일이다. 부연하면,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고, 그 개념을 매개로 새롭게 판을 짠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념을 제조하는 일은 창의적인 활동의 대표적인 한 유형이다. 이것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해 나가는 매우 진보적인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와 달리 '개념'을 수입한다는 말은 개념 제조자가 벌인 판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그 의도를 ..

매천야록(梅泉野錄)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매천 황현은 야인의 자격으로 쓴 비사, 을 남겼다. 고종 1년(1864)부터 융희 4년(1910)까지의 47년을 담았다. 마지막 문장에서 비통함은 극에 이른다. "나라가 망했다. 전 진사 황현, 약을 먹고 죽다.(韓亡 前進士黃玹 仰藥死之)" 경술국치 바로 그날이다. 그가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 한편이 이 비참한 풍경과 겹친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누나. 무궁화 피는 우리나라는 이미 망하고 말았다.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지난날 돌아보니 세상에 글자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이렇게 보면 매천은 글자(문자) 아는 사람, 즉 식자인(識字人) 노릇을 하느라 스스로 죽었다. 대체 글자니 문자니 하는 것이 무엇..

자신의 고유한 걸음걸이로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구한말, 한반도 남쪽 구례 땅에 황현(黃玹1855~1910)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호는 매천(梅泉)이다. 그는 이십대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초시에서 첫째로 뽑히고도 전라도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앉혀졌다. 이로 인해 매천은 온 나라에 가득 찬 편견과 부패를 몸소 겪게 되었고, 바로 분기탱천하여 다음 시험은 보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내려가버렸다. 그렇게 5년을 보냈다. 나중에 부친의 바람이 하도 간절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상경해 생원회시에 응시했다 장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서른넷의 나이에 성균관 생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여전한 관료계의 부정부패밖에 없었다. 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