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선방일기

선방일기 / 화두

나는... 누구인가? 2024. 11. 25. 16:35

1973년 11월 25일

달포가 지나니 선객의 우열이 드러났다. 선객은 화두(話頭)와 함께 살아간다. 화두란 참선할 때 정신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붙드는 하나의 공안인데 철학의 명제(命題), 논리학의 제재(題材)라고 말할 수 있다. 화두는 처음 선방에 입방할 때 조실스님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그 종류가 무한량이다. 흔히들 세상에 화두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많은 화두 가운데서 자기에게 필요한 화두는 단 하나이다. 단 하나일 때 비로소 화두라는 결론이다
대부분의 선객들이 붙드는 화두는 시심마(是甚麽 : 이게 무엇이냐.)이다. 예로부터 경상도 출신의 스님들이 가장 많아서 강원도 절간에서도 경상도 사투리가 판을 친다. 그래서 시심마가 불교에서는 '이 뭐꼬'로 통한다
화두는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이다. 그러니까 분석적인 것이 아니고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화두는 견성의 목표가 아니라 방편이다. 여하한 수단도 목적이 달성되면 정당화되는 것처럼 여하한 화두도 건성하고 보면 정당해진다. 화두가 좋으니 나쁘니, 화두다 아니다 하고 시비 함은 미망일 뿐이다.
훌륭한 선객은 화두에 끌러 다닌다. 절대로 끌어서는 안 된다. 처음 선방에 앉은 선객이 유식하면 유식할수록 화두에 대해 분석적이다. 유무가 단절 절대무의 관조에서 견성이 가능하다는 선리(禪理)를 납득하려고 하면 할수록 현존재인 육체의 유무에 얽매이게 되고 사유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유무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방의 연륜을 더해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식과 함께 분석이 떠나가고 그 자리에 무식과 함께 화두폐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 비로소 선객이 되는 것이다. 어느 절에를 가더라도 입구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볼 수 있다.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智解)"
유무에 얽매인 세간의 지식은 무용하다는 뜻이다.

선객을 끌고 가던 화두는 마침내 선객을 백치가 아니면 천재 쪽으로 끌어놓는다. 백치는 백치성 때문에 고통에서 해방되고, 천재는 천재성 때문에 번뇌에 얽매인다. 그래서 대우(大愚)는 대현(大賢)이 되고 대고(大苦)는 대탈(大脫)이 된다. 선객의 우열은 화두에 끌리느냐 끄느냐가 결정한다. 화두에 끌린 선객은 한한(閑閑)하나 화두를 끄는 선객은 간간(間間)하다.
우리 상원사 대중스님은 우열이 반반이다. 아무래도 상판 쪽이 한가롭고 하판 쪽이 분망하다. 상판과 하판은 비구계 받은 순으로 결정된다. 좌선의 몸가짐이 상판 쪽은 태산처럼 여여부동(如如不動)이나 하판 쪽은 여름 날씨처럼 변화무상하다. 헛기침을 하는가 하면 마른기침을 하고 가부좌의 고통을 달래 보느라 발을 바꾸어 보기도 하고 허리에 힘을 줘보기도 하고, 몸을 좌우로 혹은 앞뒤로 흔들어 보기도 하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는가 하면 포개어진 손을 위아래로 바꾸어 보기도 한다.
화두에 끌리지 않고 끌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들에게 방선의 죽비소리가 틀림없는 복음성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들도 선방을 떠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비소리가 아쉬워지다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있게 된다.
스님이라면 누구나가 선방 밥을 먹지 않은 스님이 없다. 왜냐 하면 선이 불교의 요체(要諦)이고 견성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방을 외면한 이유는 이 초기의 고통을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중 가운데 신경통을 몹시 앓은 스님이 있다.
이 스님은 화두에 끌려 다니는 스님인데 신경통의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매 세 시간의 좌선시간 중에서 한 시간 정도 앉고 나머지 두 시간은 도량에서 보행하면서 행선(行禪)을 한다. 새벽시간이나 밤 시간에도 누더기에 의지하여 설한풍(雪寒風) 속에서 행선하면서 대중스님과 꼭 같이 참선기간을 지키는 열의는 대단하다. 화두에 끌리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