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1월 7일
견성은 육체적인 자학에서만 가능할까. 가끔 생각해 보는 문제다.
우리 대중 가운데 특이한 방법으로 정진하는 스님들이 있다. 흔히들 선객을 괴객(怪客)이라고 하는데, 이 괴객들이 다시 괴객이라고 부르는 스님들이 있다.
처음 방부받을 때 논란의 대상이 된 스님은 명등(明燈)스님이다. 이 스님은 생식을 하기 때문이다. 시비와 논란의 우여곡절 끝에 방부가 결정되어 공양 시간에 뒷방에서 생식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래서 간편한 소임인 명등이 주어졌다.
수두(水頭)스님은 일종식(하루에 한 끼만 먹음)을 하고 원두스님은 오후불식을 한다. 그리고 간병(看病)스님은 장좌불와(눕지 않고 수면도 앉아서 취함)를 한다. 욕두(浴頭) 스님은 묵언을 취한다. 개구성(開口聲)이란 기침뿐이다. 일체의 의사는 종이에 글을 써서 소통한다.
그 초라한 선객의 식생활에서 더욱 절제를 하려는 스님들이나, 하루 열두 시간의 결가부좌로 곤혹을 당하는 다리를 끝내 혹사하려는 스님이나, 스스로 벙어리가 된 스님을 대할 때마다 공부하려는 그 의지가 가상을 지나 측은하기까지 한다. 이유가 있단다. 스스로 남보다 두터운 업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또는 무복중생(無福衆生)이라 하루 세끼의 식사는 과분해서라고.
뒷방에서 색다른 시비가 벌어졌다.
"도대체 인간이란 육체가 우위냐? 정신이 우위냐?" 하는 앙케이트를 던진 스님은 지전(持殿)스님이다. 언제나 선방의 괴객들을 백안시하는 이과출신의 스님이다.
문과 출신인 부목(負木)스님이 면박했다.
"단연코 정신이 우위지요. 선객답지 않게 그런 설문을 던지시요. 입이 궁하면 염불이나 할 일이지요."
선객들은 대부분 불교의식 특히 불공시식을 외면한다. 평소에 지전스님이 의식의 권위자처럼 으스대고 중이 탁자밥(佛供食物)은 내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목스님이고 보니 비꼬는 투로 나왔다. 드디어 지전스님(이과)과 부목스님(문과)이 시비의 포문을 열었다. 지전스님이 물었다.
"정신을 지탱하는 것은 뭐요?"
"그거야 육체지요."
"뿌리 없는 나무가 잎을 피우지 못하고 구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는 않을 게요. 육체를 무시한 정신이 있을 수 있겠소?"
"육체가 있으니 정신이 있는 게 아니겠소. 어찌 상식 이하의 말을 하오.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자고 하면서 말이오."
"논리적인 상식에 충실하시오. 우리는 지금 논리를 떠난 화두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고 논리에 입각해서 정신과 육체의 우열을 가름하는 시비를 가리고 있는 거요. 결국은 유물이냐 유심이냐라는 문제가 되겠소만."
"유심의 종가격인 선방에서 유물론을 들춘다는 것이 상식 이하란 말이오. 육체는 시한성(時限性)이고 정신은 영원성이란 것은 유물론자들이 아닌 한 상식으로 되어 있는 사실이오. 시간이 소멸됨에 따라 육체의 덧없음에 비해 정신의 승화를 생각해 보시오."
"본래적인 것과 결말적인 것은 차치해 두고 실제적인 것에 충실하여 논리를 비약시켜 보도록 합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생리학적인 상식을 바탕으로 보면 육체가 단연 우위일 뿐이오. 병든 육체에서 신선한 정신을 바란다는 것은 고목에서 잎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뿐이오."
"육체적인 외면이 많을수록 정신적인 승화가 가능했다는 진리는 동서고금의 사실들을 들어 예증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실증되고 있소. 나는 근기가 약해 감히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일종식이다, 오후불식이다, 생식이다, 장좌불와다, 묵언이다 하면서 육체가 추구하는 안일을 버리고 정신을 추구하는 견성을 위해 애쓰는 스님들을 잘 살펴보시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육체에 대한 사랑스러운 정신의 도전이며 승화인가를."
"그것은 작위(作爲)며 위선이오. 내가 구도자임을 표방하는 수단일 뿐이오. 참된 구도자일수록 성명(性命)을 온전히 해야 할 것이오. 양생(養生) 이후에 양지(良知)가 있고, 양지 이후에 견성이 가능할 뿐이오."
"노장학파(老莊學派)의 무위(無爲)에 현혹되지 마시오. 그들은 다만 세상을 기피하면서 육체를 오롯이 하는 일에만 급급했지 끝내 그들이 내세운 지인(至人)이 되지 못했기에 제세안민(濟世安民)을 하려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소.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소멸될 숙명에 놓여 있는 육체를 무시하면서 구경목적(究竟目的)인 견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오. 견성은 곧 중생제도를 위해서니까요"
"육체가 제 기능을 상실했을 때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 승화될 수 있겠소? 업고속에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중생이 말이오?"
"가능하지요. 그 가능성 때문에 여기 이 산속에 있지 않소. 거의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말이오."
"중생에게 절망을 주는 말을 삼가시오. 스스로 병신이 되어야 견성이 가능하다는 걸론 인데 우리 불가에서는 육체적인 불구자는 중이 되지 못하도록 규정짓고 있소. 이것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진리를 웅변으로 대변해 주고 있소. 고장을 모르고 조화된 육체야말로 우리 선객에게는 필요불가결의 요소지요. 견성, 열반, 피안, 적멸이 있기까지엔 말이오."
"끝내 스님은 그 간사한 육체의 포로가 되어 등신불(等身佛)처럼 안온한 양지쪽에 서서 업보 중생을 바라보려고만 하는군요."
"나는 등신불이 되지 않기 위해 육체를 건전히 하며 업보중생을 느끼기 위해 극악한 업보중생의 표본 같은 이 선방생활을 하고 있소. 결론에 도달해 봅시다. 나는 그 간사한 육체가 좋아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육체가 너무 싫어서 육체를 다스리고 있소. 육체는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기 때문이오. 마치 우리가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세상을 올바로 느끼지도 바라보지도 못할까 봐 세상을 멀리 하면서도 세상을 온전히 하기 위해 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을 뿐이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멀리 했다 하더라도, 세상이 불완전하더라도, 최소한도 현재 상태라도 유지하고 있어야지 근본적으로 와해돼 버린다면 우리가 견성을 해도 어쩔 수 없을 뿐이오. 이해가 되는지요? 그만합시다. 입선 시간입니다."
시비는 가려지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중생이 사는 세상에서 시비란 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바로 시(是)와 비(非 )로 구성된 양면적인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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