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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11, 12코스

나는... 누구인가? 2025. 4. 27. 21:31

2025.04.27.일
해파랑길 11, 12코스(34.34km)
소요시간 : 8시간 39분

해파랑길 11코스(17.2km)
나아해변 ←6.3km→ 봉길대왕암해변 ←1.6km→ 이견대 ←6.4km→ 전촌항 ←2.9km→ 감포항

걸은거리 19.65km
소요시간 07:43~12:22, 4시간 39분

6시에 모텔에서 나와 아침을 먹고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나아해변으로 가는 버스는 7시 10분에 있었다.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편의점에서 간식용으로 막걸리 한 병과 식빵을 샀다. 버스를 타고 나아해변에 도착하니 7시 40분이 되었다.

해파랑길 11코스는 경주구간 양남면과 감포읍을 잇는 길이다. 나아해변에서 출발해 봉길대왕암해변, 이견대와 전촌항을 지나 감포항에 이르는 길로서 역사적 명승지와 문화재가 있는 역사탐방길이자 어항과 미항을 거치는 코스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나아해변엔 벌써 낚시하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옅은 구름으로 해는 보이지 않고, 바람 한점 없는 날씨의 잔잔한 아침바다는 차분한 기운이 감돈다.

해변에서 출발한 해파랑길은 마을 골목길로 들어가 나아봉길로를 만난다.

우측은 월성원자력발전소로 들어가는 길이고, 좌측이 봉길대왕암해변으로 가는 나아봉길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해파랑길 표지판과 리본이 보이는데 이후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 못 들었나 싶어 두루누비를 켜보니 이 길이 맞다.

길어도 50여 미터마다 있는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두루누비에 의지해 계속 길을 간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봉길터널 입구까지 왔다. 그런데 터널 위 산길로 우회하는 해파랑길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왔는데 길이 없다. 그제사 자세히 검색해 보니 나아리에서 봉길대왕암까지는 위험구간이라 차량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나와있다. 아뿔싸...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잠시 고만하다가 터널을 통과하기로 했다. 터널 속 도로를 따라가면 매우 위험하지만 갓길 위쪽에 폭 1.2미터 정도 되는 터널점검용 보도가 있기에 그곳으로 걸으면 비교적 안전할 것 같았다. 그렇게 2,430미터에 이르는 봉길터널을 걸어서 지나왔다. 다시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다.

그렇게 봉길터널을 빠져나오니 봉길리 교차로에는 청정 누리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길을 건너 해변으로 나오면 대왕암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수중왕릉으로 그는 살아생전 "내가 죽은 뒤 동해의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 지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재위 21년 만인 681년에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대왕암’, '대왕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예로부터 이곳은 영험한 곳으로 여겨져서 제를 올리는 무속인들이나 대왕암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백사장이긴 하지만 물가에는 몽돌이 깔려있는 봉길 대왕암해변엔 많은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있었다. 낚시도 즐기고 있었다. 20대 초반인 35여 년 전 여행에 미쳐 전국을 돌아다니던 시절 경주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골스런, 중간중간에 비포장도로도 있는 길을 따라 감포항을 거쳐 이곳 이왕암에 왔었다. 막연히 국어책인가 국사책에 나온 이야기를 쫒아서... 해변 가까이 엄청나게 큰 바위섬이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어 도착한 봉길해변엔 도대체 대왕암이라 이름 붙일만한 바위섬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무속인들이 바닷가에서 굿을 하는 모습만 보였다. 그래서 인근 상점 주인에게 문무대왕 수중왕릉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 나지막한 바위섬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그때의 실망스러움이란...

봉길해변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 대종천을 끼고 잠시 마을길을 걷다가 31번 국도를 따라 대종교를 건넌다.

대종천의 대종은 큰 종이란 의미로 대종천에 얽힌 전설이 있다. 여몽 전쟁 당시 황룡사에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고군이 황룡사는 불태우고 그 종을 바다를 통해 본국으로 가져 가려다가 대종천 하구에서 종을 물에 빠뜨렸고 종은 바다로 흘러내려갔다는 전설이다.

대리 좌측 건너편으로 감은사지가 보인다.

동탑은 보수 중이라 서탑만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대왕암의 초라함에 실망하고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나 보러 가자 하고 온 그때의 감은사지는 정비가 진행된 지금과는 많아 달랐다. 절터 앞 들판에 어지러이 박혀 있는 전깃대도 없었고, 경지정리도 되어 있지 않아 깊은 산골의 구불구불한 논둑처럼 오랜 세월을 지내온 흔적 그대로의 전경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 와봤지만 언제 보아도 좋은 감은사탑. 문무대왕의 영혼이 깃든 성스러운 장소인 데다가 탑 그 자체의 미학 또한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묵묵히 바라보고 있으면 아련한 마음이 생기고 누군가가 보고 싶어 지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광경이다. 경주 가면 무수히 많은 삼층석탑이 있는데 여기 만큼 사람을 감동시키는 탑은 흔치 않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여여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 감은사지 삼층석탑

감은사는 동해에서 신라 수도 경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에 세워진 절이다. 이곳에는 삼층석탑 2기와 금당, 강당 등의 건물터만 남아 있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동해 바다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고, 이후 신문왕 2년(682)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 지내 달라."라고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 지낸 곳이 대왕암이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감은사는 금당, 강당, 중문이 한 줄로 배치되어 있다. 금당 앞에 쌍탑이 있고 건물들을 회랑으로 두른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보여 준다. 금당 밑에는 배수 시설이 있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자 호국사찰, 성전이 설치되었던 사찰이었지만,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자료실에서 경주막걸리를 한잔 하면서 잠시 쉬다 다시 길을 떠난다.

감은사지에서 나와 다시 31번 국도를 따라가다 '자연산회단지'라 적혀있는 입간판 아래를 통해 대본항으로 들어간다. 경주시 문무대왕면에서  대종천을 건너온 이곳은 경주시 감포읍이다.

대본항 직전 언덕 위에 노송 가지 사이로 이견대(利見臺)가 보인다. 용이 나타난 것을 본 장소라는 의미다. 이곳은 문헌에 있는 것을 1979년에 복원한 것인데, 문무대왕릉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원래의 위치에 복원한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올라가서 전경을 감상해 볼까 생각하다가 그냥 지나간다.

대본항도 동해안의 여느 작은 어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방파제가 있고 등대가 있고 소형크레인이 있는 그렇고 그런 어항인 것이다. 자연산회단지라고 적혀 있는 문구가 무색하게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관광객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하 수상하고 불경기라 그런지 작은 어촌마을에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항구 구석에는 미역 작업하는 모습만 눈에 띈다.

대본항을 떠난 길은 대본리 마을 골목길을 걸어 31번 국도와 다시 만난다. 이곳은 도로변에 인도용 데크길을 만들어 놓아 안전하게 시원한 소나무 그늘을 걷는다.

끝이 없는 것 같은 길을 때로는 도로를 따라 때로는 해변을 따라 걷는다. 가야 할 길도 아득하지만 지나온 길도 아득하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길을 뚜벅뚜벅 걷다 보니 지나온 길은 멀어져 가고 가야 할 길은 짧아져 간다. 우리가 사는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의눈을 많이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고, 쌓여가는 아쉬움이 멀어져 가면서 조급함도 생긴다. 진정으로 나를 위해 산 것은 쉽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아니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도 모른다 하겠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제부터 남은 삶은 좀 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아침 윤슬이 빛나를 바다와 아름다운 조형물을 감상하며 잠시 쉬다 간다.

지나온 대본항이 있는 곳은 대본 3리이고, 이곳은 대본 2리, 멀리 방파제와 빨간 등대가 보이는 가곡항은 대본 1리다.

가곡제당 옆 두 그루의 곰솔나무는 할아버지소나무와 할머니소나무인데 안타깝게 도 두 그루 모두 제선충에 걸려 고사하고 말았다. 자연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가곡항에도 따온 미역을 미역을 분류하고 담고, 발에 너는 작업을 하느라 어부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대본리의 중심마을이 이곳 가곡마을인데 가곡항은 예로부터 감포항을 제외하고 동경주 16개 어촌계 가운데 어선 수가 가장 많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많을 때는 60여 척에 이르던 어선은 현재에도 42척에 이르러 활발한 어로 활동을 펼치고 있으니 인근 마을 가운데서는 어업이 가장 잘 발달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 몽동해변을 걷는다. 현대식 건물로 지은 절 아래 미륵부처님이 바다를 향해 보고 계신다. 바다의 안녕과 어부들의 풍어를 기원하고 계시리라...

몽돌해변도 지나고,

국도변 데크길도 걷고,

다시 해안가로 나가 바위와 자갈 해변이 이어지는 동해안 자전거길을 걸어서

나정항에 도착했다.

나정항 부근엔 식당들도 많이 보이고 작은 해변 공원도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 것 같다

수많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나정 마을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은 것을 기념하여, 후세가 만파정(萬波亭)이라는 지었는데 신라의 '나', 만파정의 '정'을 합쳐서 나정 마을이라 했다고 하는데, 만파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 낮이라 그런지 '신라의 달밤'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지역이 경주인 것이 실감 나게 가게 이름이 '다보탑', '토함산' 등등이다.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의 두 광경을 감상만 하고 걷느라 사진을 남기지 못해 티스토리 '너울의 창'님 블로그에서 빌려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었다. 또한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은 하늘의 신이 되었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신문왕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세웠다. 그런데 어느 날 동해 한가운데에서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떠내려 왔다. 이상하게 여긴 신문왕이 점을 쳐보게 하니, 문무왕과 김유신이 나라를 지킬 보배를 준다고 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작은 산에 있는 대나무가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신문왕이 이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자 바다에서 용이 나타났다. 용은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처럼 대나무도 합한 뒤에야 소리가 납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쳐 보배를 보내는 것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신문왕은 용이 일러준 대로 대나무를 가져와 피리를 만들었다. 실제로 피리를 불었더니 신라에 침입한 적군이 물러갔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날이 개면서 물결도 잔잔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고 신라의 국보로 삼았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통일 국가를 세웠지만, 두 나라의 유민들은 쉽사리 신라인들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신문왕이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나라 안이 어지러웠다. 만파식적은 갈라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나정항을 떠난 길은 해변 자전거길을 따라서 나정 고운 모래 해변으로 나아간다.

멀리 전촌항이 바라다 보이는 나정 고운 모래 해변이다. 고운 모래 해변이라는 이름답게 모래가 곱다. 왼편엔 해변을 따라 오토캠핑장이 길게 조성되어 있다.

전촌 솔밭해변으로 넘어가는 작을 샛강을 건너는 인도교는 현수교로 만들었는데 주탑이 만파식적이다. 이 다리를 경계로 감포읍 나정리에서 감포읍 전촌리로 넘어간다.

깔끔하게 정비된 전촌 솔밭해변도 산책하기 좋은 길이었다. 솔밭은 오토캠핑장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피서철이면 많은 사람들로 붐빌 것 같다.

전촌천을 건너는 인도교는 완공이 되었는데도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다. 망설이다 보니 그냥 건너는 사람들이 있어서 따라 건넌다.

전촌항은 지난 2004년 정부의 어촌관광단지 조성 사업지구로 선정되어 관광어항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항구 입구의 말 조형물, 일명 거마상도 볼거리이다. 전촌항 일대는 말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전촌항 인근에 거마장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전촌항 북쪽 산세가 마치 말이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거마산이라 칭했다 전한다. 또, 신라 시대에는 왜군의 침임을 막기 위해 병마가 주둔해 있던 곳이라 하여 이 일대를 거마장이라 불렀다는 데에서 전촌항 인근의 거마장 마을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전촌항을 떠난 해파랑길은 이제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거마산 해안 절백길을 향해 간다. 뒤로하고 이제 용굴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해안길 돌계단 입구에 고사목 제거와 테크보수를 한다고 통행제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어디로 우회하라는 안내문도 없고 두루누비 앱에도 별도 공지가 없어 난감해하다 그냥 돌계단을 올라 데크길을 따라간다.

길은 기암절벽 해안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만들어져 있고 주변 고사목 제거가 한창이다. 안타까운 것이 수형도 좋은 이 많은 소나무들이 왜 말라죽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산불 때문인지 재선충 때문인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고목들이 푸르게 살아 있다면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아름다운 길이었을 텐데...

감포항과 사룡길 갈림길이 나오는데 내려갔다 오기가 힘들 것 같아 감포항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해안가에 내려서니 이름 모를 난초가 길손을 반기는데, 그 앞바다 전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해변을 따라서 감포항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해변엔 삿갓을 쓴 태공이 시간을 낚고 있고, 갈매기들은 간데없다.

해변을 걸어 전촌 1리 거마장 마을로 들어왔다. 해변 건조대에는 가자미들이 줄에 묶여 바람을 쐬고 있고, 비췻빛 바다는 나무나 곱다.

1925년 개항한 감포항은 올해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는 경주 최대의 항구이다. 항구 주변에는 항상 고깃배들이 드나들고, 활어 위판장에서는 매일 신선한 생선이 경매로 오간다. 감포항 방파제가 있는 곳에 조성된 감포 해상공원의 경우 2018년 조성된 곳으로 해안데크, 바람개비 동산, 감포항 조형물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감포항 방파제에는 감은사지 3층 석탑을 음각화한 아름다운 등대가 우뚝 솟아있고, 바다낚시 포인트로 유명해 낚시를 즐기기에도 좋은 곳이다.

개항 100주년 행사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임시로 설치된 가설 매장엔 각종 지역특산물과 싱싱한 회, 해산물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배도 출출하고 목도 말라 막걸리 한잔을 하고 간다.


해파랑길 12코스(13.3km)
감포항 ←1.4km→ 송대말등대 ←2.5km→ 오류고아라해변 ←5.3km→ 소봉대 ←4.1km→ 양포항

걸은거리 14.69km
소요시간 12:22~16:23, 4시간

해파랑길 12코스는 경주구간으로 경주 감포읍에서 포항시 남구 장기면을 잇는 길이다. 감포항에서 출발해 송대말등대와 오류고아라해변, 연동마을을 지나 양포항에 이르는 구간으로 어촌마을, 미항을 잇는 해안로로 동해경관과 마을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주요 관광포인트로는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라는 의미의 송대말'등대. 울창한 송림과 등대전시관 고려말 성씨가 다른 세 집이 마을을 형성할 무렵 연꽃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연동마을 작은 봉수대가 있던 섬이라는 뜻의 바다낚시
명소 소봉대가 있다.

항구 입구에 있는 감포공설시장은 휴일을 맞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난전도 열려 할머니들이 집에서 직접 가꾼 채소나 말린 생선을 팔고 있었다. 가격을 보니 아주 싸게 팔고 있었다. 말린 가자미를 사고 싶었으나 배낭 속에 넣어 트레킹을 하는 동안 상할 것 같아 아쉽지만 포기했다.

감포항 10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 했지만 시장기가 가시지를 않아 점심 먹을 곳을 찾는데, 마침 공설시장 앞 버스정류장 옆에 기사식당이 보였다. 경험상 기사식당은 어디를 가더라도 맛집인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정식 백반을 시켰는데 가자미 미역국이 나왔다. 맛이 일품이다. 남해안엔 봄이면 도다리 쑥국이 인기인데 가자미 미역국도 맛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거기다 가격까지도 착하다. 만원.

옛날에 경주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려왔던 감포항은 조그마한 어촌마을로 기억되는데 오늘 다시 와서 보시 대형 어항이다. 강주는 물론이고 동해안 어항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것 같다.

항구 주변 난전에는 각종 건어물을 판매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가자미다.

활어 직판장 벽에 그려진 기름가자미를 그물로 잡고 있는 그림이다. 기름가지미는 동해안에서 가장 흔한 가자미 종류로 깊은 바다에 산다고 한다. 해파랑길을 걷다 보면 지천으로 가지미를 말리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주로 소금구이로 먹는 생선이다. 지방이 많아서 기름가자미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감포항을 돌아서 하얀 등대, 송대말등대 쪽으로 간다. 등대로 가는 마을 안 길은 예쁘게 벽화를 그려놓아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마을 주민들도 아름다운 벽화에 동화되어 유순한 마음씨를 지니고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송대말등대는 등대를 보고는 다시 돌아 나와야 할 것 같은 지형이었는데 막상 가서 보니 해변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여기는 오늘 걷는 길 중에서 최고이고 여기서 오늘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보니 아득하게 보였다.

송대말 등대에서 바라본 감포 항 전경

감포항 북쪽에 있는 송대말 등대는 육지 끝에서부터 암초들이 길게 뻗어 있어 작은 선박들의 사고가 빈번한 감포 앞바다의 해상 안전을 위해 처음에는 무인 등대로 건립되었으며, 이후 유인등대로 승격되어 운영하였고, 현재는 그 기능을 다 하여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한다. 송대말(松臺末) 이란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라는 뜻으로 수령 300년~400년 정도 된 아름드리 해송림이 등대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으며 등대 앞에는 관람객을 위한 나무 데크길이 설치되어 있어 산책하며 주변 경관을 둘러보기 좋다. 송대말 등대가 운영되지 않는 대신 그 옆에 경주시 감포읍의 상징인 감은사지 석탑 모형을 본떠 새롭게 만든 5층 등대 건물을 지어 1, 2층은 빛 체험 전시관으로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3, 4, 5층은 기존 등대의 역할을 대신해 감포 앞바다를 비추고 있다고 한다.

송대말등대를 떠난 길은 이제 척사항으로 향한다. 소나무와 바위가 멋을 부리는 길을 지나고, 벽화로 장식된 마을길도 지난다.

감포읍 오류리는 척사항이 있는 마을이다. 척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고아라 해변과 연관도아 있는데, 처음에는 모래밭이 길다고 '장사'라고 했던 적도 있었는데, 비단처럼 고운 해변을 자로 잰다는 의미로 척사(尺紗)가 되었다고 한다.

척사항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신라와 깊은 역사를 가진 곳이다. 이 지역은 바다와의 연관성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방파제 끝에 있는 빨간 등대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모티브로 제작했는데, 이 지역의 상징으로,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띈다. 바다를 지키기 위한 등대의 역할을 하며, 그 자체로도 멋진 포토죤이다.

척사항을 떠난 길은 오류고아라 해변을 만난다.

오류고아라해변은 1km의 백사장과 1.5m 안팎의 수심에 소나무 숲이 우거진 해변으로, 굵은 모래가 부드러워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소나무숲에는 오류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어 텐트, 카라반등을 설치하여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를 가나 가자미다.

고아라해변을 걷던 길은 잠시 31번 국도를 따라 걷는다. 해변가든 국도변이든 풍광이 좋고 적당한 곳은 모두 펜션이나 횟집이 들어서 있었다. 국도변을 따라가던 해파랑길은 다시 해변길로 나가  바다를 보며 걷기를 반복한다.

해변가로 나온 남파랑길은 조용한 연동마을을 지난다. 연동 어촌 체험 마을이 있는 연동 방파제의 모습이다. 연동마을은 고려 때 사람들이 정착해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당시 연못에 연꽃이 많아서 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다. 멀리 마을 끝에는 아파트인지 리조트인지 모를 건물이 많이 보인다.

정면에 보이는 흰색 2층 건물에 '연동어촌체험마을 펜션'이라고 상호가 붙어 있고,
그 뒤에 있는 건물은 풀빌라 펜션이다. 멀리서 보았을 땐 아파트 같았던 건물이 여러 동 이어져 있다. 요새는 풀빌라가 아니면 손님들이 찾지 것 같다 새로 지은 건물은 모두 풀빌라들이고,  일반펜션 앞에는 차들이 보이지 않고 풀빌라 앞에 만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해파랑길은 연동마을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유난히도 검푸른색의 바다가 노란색 방파제와 대비되어 더욱 검게 느껴진다.

연동항을 떠나온 길은 두원 방파제를 지나면서부터는 경주시 감포읍에서 포항시 장기면으로 넘어왔다. 이제 해파랑길은 포항길을 걷는 것이다.

동글동글한 몽돌길을 걷다가 때로는 거친 돌길을  걷다가 하다 보니 해파랑 표지판도 바위에 붙어있다.

때로는 걷기 좋은 길도 있고, 때로는 거칠고 힘든 길도 있지만 경치만은 일품이다. 우리의 삶도 이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즐겁고 생복한때도 있고, 힘들고 고뇌에 찬 여정도 있지만 잠깐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 소소한 행복은 늘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다.

기암괴석이 가득한 해안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훌쩍 솟아오른 선돌이 하나 있다. 파란색이 어우러진 길도 예쁘지만 무엇보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살렸다는 점이 매력이다.

짧은 길이지만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포항 바닷가의 멋스러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해변을 걷던 길은 잠시 국도로 올라왔다 이내 다시 해변가로 나간다. 중간중간에 가유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해변을 걷다 다시 국도를 걸어서 계원리 바닷가에 도착했다. 길은 끊어지고 길이 없는 길을 몽돌밭을 따라 걷는다. 맑은 물을 보는 것도 좋고, 덤으로 몽돌 구르는 소리도 가까이에서 들으니 힘든 길이 즐겁다.


멀리 보이는 해변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양식장을 지나 다시 31번 국도를 다시 만난다. 위험하지만 조심스레 국도변을 조금 걷다 보면 바로 우측으로 꺾어지는 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우회전한다.

국도를 따라가던 길은 마을이 나타나고 '계원' 버스 정류장을 끼고 우회전하여 마을길로 내려가 계원항에 도착했다.
해변과 국도를 지나다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집들이 많이 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멋진 곳에 잘 지은 학교가 폐교된 곳도 있었고, 오래된 집을 깨끗하게 수리 한 집들도 많이 보였고, 새로이 잘 지은 집들도 보였다. 그런데 이런 집에도 인기척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도시에 살면서 별장용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계원항에서 양포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 중간에서 오르막 골목을 올라 마을 위 언덕배기에 있는 국도를 다시 걸어야 한다. 마을을 접어들어 중간쯤 올라가는데 수형이 그림과 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띈다. 이 얼마나 멋진 자태인가. 하지만 이 나무 또한 제선충의 폐해를 피해 가지 못하고 고사하고 말았다. 안타깝고 안타깝다.

국도도 올라온 길은 양포항을 향해 간다. 이제 0.9km 남은 것이다. 오늘의 일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전방에 보이는 양포교를 건너 우회전하면 양포항이다. 그런데 도로표지판 상단에 '장기 유배 문화 체험촌'이란 문구가 보인다. 이곳은 그렇게 오지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유배지였던가 싶어 검색해 보니 '다산 정약용'이 한때, 이곳에 유배를 왔었다는 내용과 고려 시대에 축성했다는 장기읍성이 체험촌에 같이 있다는 안내이다.

방파제로 가는 길은 새로이 단장했는지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넓은 항구에는 적지 않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이곳도 많은 어선들이 정박 중이었고 관광객인지 주민들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파제에서 낚시도 즐기고 산책도 즐기고 있었다.

12코스 종점은 방파제 부근이 아니라 항구 북쪽에 있는 주차장 한편에 있으므로 데크길을 걸어서 종점으로 향한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차는 감포항에 놓고 왔기 때문에 이제 버스를 타고 다시 감포항으로 돌아가야 한다. 항상 그렇지만 트레킹을 마치고 나면 배가 출출해진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영일만 친구'막걸리 한 병과 소보로빵 한 봉지를 사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버스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