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선방일기

선방일기 / 세모

나는... 누구인가? 2025. 7. 30. 17:50

1973년 12월 31일

섣달 그믐날이다. 낮 시간은 울력으로 보냈다. 떡방아도 찧고 대청소도 했다. 세탁도 하고 목욕도 했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얼른 잠이 오지 않았다. 세모(歲暮)라는 감정 때문이다. 세모는 날 일깨우면서 돌아다 보라고 한다. 인간은 직립(直立)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이 아니라 지나간 날을 돌아보고 비쳐볼 줄을 아는 의식의 거을을 가졌기에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고 하면서,
일년이 하루같이 단조로웠던 선객(禪客)생활이었는데 돌아다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돌아다 보라고 세모는 말하고 있다. 돌아다보니 하자(瑕疵)투성이다. 나는 정초에 아무런 계획도 새우지 않았다. 계획을 세울 만큼 희망적인 계기도 없었지만 계획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가질 절망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으나 막상 그러질 못했다. 무엇보다도 아쉬움이 앞섰다.
정초는 태백산 토굴에서 화두와 함께 맞이했다. 화두는 어떤 의미와 내용으로 살펴보아도 정초와 똑같을 뿐인데 나의 등신(等身)은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이가 하나 뽑혀 나갔고 이마의 주름살은 수를 더해 가면서 골을 깊이 했고 머리숱은 수를 줄여 가면서 윤기를 빼았겨 버렸다. 받은 것이 있다면야 주어야 하고, 준 것이 있었다면 받아야 하는 이 세모에 나는 갚지는 못하고 또 빚만 지고 말았다.
불은(佛恩)을 무한히 입어 선방에 머무를 수 있었고 시은(施恩)으로 육신을 지탱할 수 있었음에도 견성을 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보은(報恩)하리. 회한이 몸서리 쳐진다.
그러나 세모는 나에게 알려 온다. 이제 한 해의 시간은 다 가고 제야(除夜)가 가까웠음을. 그러면서 타이른다. 한 해의 것은 한 해의 것으로 돌려 주라고. 그러면서 마지막 달력장을 미련 없이 뜯어버리고 새 달력장을 거는 용기를 가지라고. 인간이란 과거의 사실만을 위해 서있는 망두석(望頭石)이 아니라 내일을 살려고 어제의 짐을 내려놓으려는 자세가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고.
화두는 어서 변화를 보여 달라고 하면서도 깊은 잠속으로 끌고 간다. 밤에 우는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올드 랭 사인'처럼 아쉽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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