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나는... 누구인가? 2024. 4. 11. 23:29

인간이 그리는 무늬 / 최진석 著, 소나무 刊
(프롤로그 2)

예전에 어느 방송사에서 방영된 <무릎팍 도사>에 영화 <매트릭스> 감독으로 유명한 워쇼스키 남매가 출연했었습니다. 대학을 자퇴하고 목수 일을 잠깐하다가, 굶어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극장가가 되었다더군요. 그때 "그래도 대학은 졸업해야 되는 것 아닌가?"랄지 "일단 직업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굴복했다면 그처럼 위대한 감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경지 정리가 매끄럽게 잘된 땅에서 누구나 심으려고 하는 작물을 심고 남들보다 더 잘 되기만을 바라는 경쟁적인 요행심을 갖는 것보다 차라리 측량도 안 된 황량한 들판에 서서 땅과 자신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우직한 자

-  자와 컴퍼스로 그려진 정치(精緻)한 설계도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집 지을 땅위에 서서 바람의 소리를 따르고 태양의 길을 살펴 점 몇 개와 말뚝 몇 개로 설계를 마무리할 수 있는 자

- 외국 철학자들 이름을 막힘없이 들먹이면서 그 사람들 말을 토씨 하나까지 줄줄 외우는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애써 자기 말을 해보려고 몸부림 치는 자

-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서 이념을 새로 산출해 보려는 자

- 믿고 있던 것들이 흔들릴 때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자

- 이론에 의해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고 문제 자체에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자

- 봄이 왔다고 말하는 대신에 새싹이 움을 틔우는 순간을 직접 경험하려고 아침 문을 여는 자

-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자

- 들은 말을 여기저기 옮기지 않을 수 있는 자

- 옳다고 하더라도 바로 행동하지 않고 조금 더 기다려 볼 수 있는 자

-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를 뚫고 머리를 내밀어 볼 수 있는 자

- 호들갑스럽지 않고 의연한 자

- 기다리면서도 조급해 하지 않을 수 있는 자

- '해야 할 무엇'보다 '하고 싶은 무엇'을 찾는데 더 집중하는 자

- 십여 시간이 넘는 비행 여정에서도 내릴 때까지 시계를 한번도 안볼 수 있는 자

- 아는것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근거로 모르는 것으로 넘어가려 하는 자

- 이성으로 욕망을 관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욕망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자

- '나'를 '우리' 속에서 용해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는 자

- 모호함을 명료함으로 바꾸기보다는 모호함 자체를 품어 버리는 자

- 자기 생각을 논증하기 보다는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자

- 남이 정해 놓은 모든 것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자

- 편안한 어느 한편을 선택하기보다 경계에 서서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자

바로 이런 자들이 '사람'입니다. 이성이 아니라 욕망의 힘이 주도권을 가진 것이지요. 그런 자가 내 작은 정원의 문을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로서 공간에 갇힌 시간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으며 나지막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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