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1월 3일
선방의 역사는 뒷방에서 이루어진다. 뒷방의 생리를 살펴보자.
큰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길다랗게 놓인 방이 뒷방(혹은 지대방)이다. 일종의 휴게실이다. 개인 장구가 들어 있는 바랑이 선반위에 줄줄이 담을 쌓고 있어서 누구나가 드나든다. 휴게시간이면 끼리끼리 모여앉아 법답을 주고받기도 하고 잡담도 한다. 길게 드러누워 결가부좌에서 오는 하체의 피로를 풀기도 하고 요가도 한다.
간병실과 겸하고 있어 병기가 있으면 치료도 한다. 웃을 꿰매는가 하면 불서를 보기도 한다.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일기도 쓴다. 어느 선방이거나 큰방 조실이 있음과 동시에 뒷방 조실이 있다. 큰방 조실은 법력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병기(病氣)와 구변(口辯)이 결정짓는다. 큰방에서 선방의 정사가 이루어진다면 뒷방에서는 야사가 이루어진다.
선방에서는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에 의해 우세가 결정되기도 한다.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은 스님은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고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은 스님은 점차로 선객의 옷이 벗겨지게 마련이다.
상원사의 뒷방 조실은 화대(火臺)스님이 당당히 차지했다. 위궤양과 10년을 벗하고 해인사와 범어사에서도 뒷방 조실을 차지했다는 경력의 소유자이고 보니 만장일치의 추대다.
사회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불가에서는 사교(四敎)까지 이수했고 절밥도 10년을 넘게 먹었고, 남북의 대소 선방을 두루 편력했으니 뒷방 조실로서의 구비요건은 충분하다.
금상첨화격으로 달변에다 다혈질에다 쇼맨십까지 훌륭하다. 경상도 출신이어서 그 독특한 방언이 구수하다. 낙동강 물이 마르면 말랐지 이 뒷방 조실스님의 화제가 고갈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파라독스하고 때로는 페이소스하다. 때로는 도인의 경계에서 노는 것 같고 때로는 마구니의 경계에서 노는 것 같다. 제불조사(諸佛祖師)가 그의 입에서 사활(死活)을 거듭하는가 하면 현재 큰스님이라고 추앙되는 대덕스님들의 서열을 뒤바꾸다가 때로는 캄캄한 밤중이나 먹통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무불통지요, 무소부지인 체하면서 거들먹거리지만, 그의 천성이 선량하고, 희극적인 얼굴 모습과 배우석인 소질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버림받지는 않지만 추앙받지도 못했다. 천부적인 뒷방 조실감이라는 명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이 뒷방 조실이 가끔 치명적으로 자존심에 난도질을 당하고 뒷방 조실의 지위를 위협당하는 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원주스님 때문이다.
선방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원주스님은 대중들의 생필품 구입 때문에 강릉 출입이 잦았다. 강릉에 가면 주거 포교당인데, 포교당은 각처의 여러 스님들이 들렀다가 가는 곳이어서 전국 사찰과 스님들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즈음처럼 교통이 발달되고 보면 신문보다도 훨씬 빨리 그리고 자세히 알 수 있다.
원주스님도 꽤 달변이어서 며칠 동안 들어 모은 뉴스원을 갖고 돌아오면 뒷방은 뒷방 조실을 외면하고 원주스님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그때 뒷방의 모든 헤게모니를 빼앗기고 같이 경청하고 있는 뒷방 조실의 표정은 우거지상이어서 초라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뉴스가 한 토막씩 끝날 때는 막간을 재빨리 이용하여 뉴스에 대한 촌평을 코믹한 사족을 붙이거나 독설을 질타하는 것으로 체면유지를 하다가 원주스님의 뉴스원이 고갈되자마자 맹호출림의 기상으로 좌중을 석권하기 위해 독특한 제스처로 해묵은 뉴스들을 끄집어내어 재평가를 하면서 일보통(뉴스통)의 권위자임을 재인식시키기에 급급하다. 면역이 된 대중스님들은 맞장구를 치지도 않지만 삐에로의 후신인 양 지껄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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