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30일
그믐이다. 삭발하고 목욕하고 세탁하는 날이다. 보름과 그믐에는 불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날 이기 때문에 세탁을 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내복을 입어야 하고 내복에는 이 따위가 있기 때문에 세탁을 하면 살생을 하는 결과가 된다.
겨울철 목욕탕과 세탁장 시설이 협소하니 노스님들에게 양보하고 젊은 스님들은 개울로 나가 얼음을 깨고 세탁을 하고 목욕은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손질하는 짓으로 끝낸다.
날카롭게 번쩍이는 삭도(削刀)가 두개골을 종횡으로 누비는 것을 바라볼 때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내 머리카락이 쓱쓱 밀려 내릴 때는 시원하고 상쾌하다. 바라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 때문이다.
오후에는 유나(維那)스님의 포살이 행해진다. 삼장(三藏, 經·律·論)중에서 율장(律藏)을 다룬다. 사분율의(四分律儀)에 의해 사미 10계, 비구 250계가 나열되고 설명된다.
선(禪)은 원칙적으로 교외별전(敎外別傳, 교설 밖에 따로 전함)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곧바로 자신의 마음을 통해 자기의 본성을 보아 깨달음) 불립문자 견성성불(不立文字 見性成佛, 문자를 세우지 않고 자기의 본성을 깨달음)을 외치면서 자성(自性)의 오득(悟得)을 주장한다. 인위적인 일체의 잡다한 형식을 무시하고 관계를 단절하고 심지어는 불경까지를 외면한 체 오직 화두에 의한 선리참구(禪理參究)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선객은 괴벽하게 보이고 비정하게 느껴진다. 그런 선객들에게 계율을 말하고 보살행을 설파함은 도로(徒勞) 일뿐이라는 걸 유나스님은 잘 알면서도 노파심 때문에 행하고 있고 또 대중들은 듣고 있다. 중생의 모순성 때문인지 모순의 이율성(二律性) 때문인지. 몇몇 스님들은 포살에 참석하기는 하나 유나스님의 개구성(開口聲)을 마이동풍 격으로 처리하면서 자신의 화두에 정진하는가 하면 몇몇 스님들은 아예 밖으로 나가 포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포살을 폐지하자는 혁신론을 내세우지 않는 이유는 모든 것은 필연성과 당위성, 그리고 우연성까지 곁들인 역사성임에 틀림없으니 내가 견성하지 못하는 한 진부(眞否)나 가불가(可否可)를 판별할 수없다. 그러니까 두고 보자는 극히 보수적이면서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다. 불교의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때문일까. 실존철학의 존재는 존재를 존재시키기 위한 존재라는 것 때문일까.
중생세계에서 보면 필요성을 주장하면 이유가 되고 타당성을 주장하면 독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방관자가 된 채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오직 견성에 매달려 중생계를 탈피하려 한다. 자신이 중생에 머물러 있는 한 모든 판단의 척도가 중생심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불가에서는 시비(是非)는 터부로 여기지만 그러나 시비가 그칠 때가 없으니 역시 중생인지라 어쩔 수 없을 뿐이다.
'인문학 > 선방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방일기 / 유물과 유심의 논쟁 (0) | 2024.08.19 |
---|---|
선방일기 / 선방의 풍속 (0) | 2024.07.18 |
선방일기 / 선객의 운명 (0) | 2024.06.17 |
선방일기 / 선방의 생태 (1) | 2024.06.10 |
선방일기 / 소임 (0) | 2024.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