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노자와 장자

영감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 2024. 9. 9. 10:39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장자의 부인이 죽었다. 장자의 친구 혜시(惠施)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는데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혜시가 말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할 만한데, 어떻게 노래까지 할 수 있나?" 장자가 말했다. "나라고 해서 왜 슬프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근원을 따져 보니 아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거야. 내가 축복해 주는 게 맞아." 보통 사람들은 아내가 죽으면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내가 죽으면 슬퍼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일관하던 사람들은 누가 더 눈물을 많이 흘리느냐, 누가 더 슬퍼하느냐를 따진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있는 틀에 빠져 있을 때 장자는 찰기시(察其始) 즉 근원을 들여다봤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던 방향대로 슬퍼했지만 장자는 슬퍼하는 방향대로 슬퍼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서 그 근원을 살펴봤다는 의미이다. 왜 그랬을까? 장자의 내면에 영감 한 덩어리가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영감이란 익숙함, 습관, 정해진 생각의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맞이할 수 없다. 영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보통은 움직임이 없는 상태, 소리가 안 나는 상태, 말이 없는 상태를 '고요'라고 한다. 고요는 형식적이든 현상적이든 조용함, 그 자체이다. 고요는 어떤 행위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지만, 모든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정적(靜寂) 또한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라는 점에서 고요와 비슷하지만, 고요는 인간의 삶 그리고 존재의 활동에서 단지 소리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가는 행위가 역전하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다. 야구선수가 공을 치기 위해 방망이를 어깨 쪽으로 서서히 돌리며 올린다. 다 돌렸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는 이제 공을 치러 내리며 휘둘러야 하는데, 배트는 올라가다가 방향을 바뀌 내려오는 과정을 겪는다. 올라가다가 내려올 때는 방향이 반대로 역전되는 순간이 생기는데, 바로 그 순간이 고요다. 이 고요의 순간은 사실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운동의 모든 동작에는 고요의 순간이 발생하고, 이 고요의 순간에서 타격의 정확도나 질이 결정된다. 장자도 고요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영감은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럽다. 공개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 몰래 나만 경험하는 것이다. 오직 나만 느낄 수 있다. 문명을 창의적 활동으로 정의한다면, 문명은 영감에 빛 지고 있다. 영감은 개인적이기에, 문명의 진화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내'가 담당한다. 그래서 세상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나'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보면 우리나라를 새롭게 만드는 사명도 '우리 몫'이 아니라 '내 몫'이다. 모두가 나를 지키지 않고 우리로 모여 있으면 그 나라의 문명과 진화는 일어나기 어렵다. 내가 나로 등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나'는 쉽게 '우리'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나'들의 연합으로 '우리'가 구성되어야 사회가 건강하다. 정해진 '우리' 속으로 들어가서 '나'가 용해되어 버리면 그 사회는 쉬게 이념화되거나 진영으로 나뉘어 분열하기 쉽다. 우리 사회가 진영으로 나뉘어 극심한 분열을 겪는 것도 나'가 나'로 존재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의와 영감이 없다면, 그 문명은 진화할 수 없다. 창의와 영감은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럽다. 따라서 우리를 탓하거나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차라리 독립적으로 성장한 내가 영감을 찾으려고 발버둥 쳐야 한다.

동학사상에 '인내천(人乃天)'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인간'이 하늘이라기보다는 '내'가 하늘이라는 뜻이어야 한다. 우주는 우리가 아닌 내가 책임자라는 의미이다. 책임성을 '나'가 아니라 우리'에게 두는 한, 진화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영감은 우주를 책임지는 존재인 '내'가 '우리'에서 이탈한 모험의 대가로 우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영감이란 우리에서 이탈한 내가 경험하는 매우 신령스러운 느낌이다. 이것은 예감 같은 것으로, 이 예감을 그대로 밀고 나가 인간은 미래로 나아간다. 인간의 존재적 의미는 내가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영감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강렬한 욕망, 아직 갖지 못한 것을 가져보려는 강한 욕망이 있다는 증거이다. 장자의 욕망은 소요유(逍遙遊), 즉 자유로운 인간으로 완성되고 싶은 것이었다. 그 욕망이 끊이지 않고 더욱 강해지며 계속되어서 영감을 맞이할 수 있었고, 결국에는 삶의 근원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인간은 펼쳐 나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인간은 앞으로 펼쳐 나가려는 욕망을 끝까지 견지하고 어떤 인간은 중간에서 멈춘다. 중간에서 멈추는 사람은 지쳤기 때문이다. 욕망을 가진 인간은 지치지 않으며, 지치지 않는 인간은 결국 영갑을 맞이한다. 또한 인간은 궁금해하는 존재이다. 사람을 그 사람으로 펼쳐 나가게 하는 힘은 욕망이고 궁금증이다. 사람은 모르는 곳에 집중한다. 그런 인간은 지치지 않는다. 모르는 곳에 관심을 표하지 않는 인간은 지친 인간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더 관심이 가면 지친 인간이고, 모르는 것에 더 관심이 가면 지치지 않은 인간이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적 쾌락에 집 중하면 지친 인간이다. 누군가가 알기 어려운 추상적이고 지적인 것을 더 궁금해한다면 그는 아직 지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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