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노자와 장자

시선

나는... 누구인가? 2024. 9. 25. 10:52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의식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의식을 생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생각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정한 높이에서 작동할 때 그것을 또 시선이라고 부른다.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는 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자가 위나라 왕으로부터 큰 박이 열리는 박의 씨앗을 선물로 받아 뒤뜰에 심었다. 아니나 다를까 싹이 자라나 엄청나게 큰 박이 열렸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커서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을 지경이고,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 해도 납작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다. 위나라 왕이 말한 대로 박이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서 깨버리고 말았다. 혜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장자가 말했다.

그렇게 큰 박이 열렸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놓고 즐기려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셨소? 선생은 생각이 꼭 쑥대 대롱에 난 작은 구멍만큼이나 줍디좁군요.

누구나 익숙한 생각에 쉽게 갇힌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물을 담아 다니거나 쪼개서 바가지로 쓰는 일을 먼저 떠올리고, 그 생각에 '박'의 용처를 제한해버린다. 그러면 '박'은 물을 담고 뜨는 기능에만 갇혀 그 이상의 다른 것을 하기 어렵다. 갇힌 생각은 이처럼 갇힌 세계를 만든다. 세계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버린다. 이미 있는 익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대용 방안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로 성패가 결정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관리하려고 하는 일은 보통 누구나 하는 일이다.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는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새 적응 방법을 찾아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예상 밖으로 '큰 박'은 이전에 대면한 적이 없던 새로 맞닥뜨린 세계다. 기존의 생각에 갇혀 있었던 혜자는 이 '큰 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혜자에게는 '없는 세계 '가 되었다. 박을 깨서 새로운 세계 자체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장자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 적응 방법을 만들어냈다. 창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는 '박 배'가 탄생 하였다. 바로 창조다. 이런 창조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장자가 '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은 기존의 관념이 주는 무게감을 이겨낼 수 있는 단련된 자아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아가 이념과 관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단련된 상태. 사실은 이것이 모든 창의적 활동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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