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노자와 장자

창의

나는... 누구인가? 2024. 11. 6. 08:31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창의는 익숙함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까닭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이다.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님어가는 일이리면, 그것은 철저한 탐험의 결과다. 장자의 '박 배'도 장자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아니라, 그의 탐험 정신이 만들어냈다. 그 탐험 정신은 장자를 여기서 저기로 성큼 건너가게 했다.

탐험 정신이 살아 있는 문명은 강하다.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문명을 강하게 만드는가? 문명은 생각이 만든다. 생각이 문명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매우 효율적인 생각의 얼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이자 이론이다. 앎의 체계인 것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을 생산하는 문명은 통제력이 클 수밖에 없고, 통제력이 큰 문명은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식이나 이론을 수입하는 문명은 종속적이기 때문에 주도권이 없어 강한 면모를 보이기 어렵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때, 보통은 어떤 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앎을 매우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앎이 문명을 통제하고 확장하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초인데, 앓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사회에서는 이론의 생산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의 생산까지 보장할 수 있는 앎은 어떤 것에 대해 지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당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고 몸부림쳐야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이 사는 무대는 '문명'과 '자연'으로 되어있다. 문명은 인간이 만들고,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두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진다. 자연은 내장된 자연 그대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면 되지만, 문명 세계는 인간이 계속 만들어나간다. 어쩔 수 없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 혹은 아직 모르는 곳을 열며 나아간다. 이것을 장자는 [대종사(大宗師)]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곳을 기른다."

장자에 따르면,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발버둥이 문명을 전개하는 토대이다. 이렇게 되면, 지적인 최고 단계는 엉뚱하게도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서 '태도'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확장성을 포기한 앎은 이론의 구축이나 생산까지는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이론의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진보적인 선진 문명을 꿈꿀 수는 없다. 앎의 진보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바로 그 '발버둥'이나 '몸부림'에 있기 때문이다. '발버둥'이나 '몸부림'은 지적인 영역 밖의 것으로서, 차라리 그것을 인격적인 활동이나 '태도' 나 '기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문명을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과학기술 문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과학기술을 구체화활 수 있는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면, 분명히 그들은 지적인 '발버둥'이나 '몸부림'을 훨씬 더 강하게 발휘하였을 것이다. 더 탐험적이었고 더 모험적이었을 것이다. '발버둥' '몸부림' '탐험' '모험'이 없이는 새롭고도 높은 지식과 이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각, 지식, 이론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다. 그것들이 세계를 새롭게 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새롭게 열 때, 인간이 발휘하는 능력을 '창의'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고도의 어떤 것이 분명하다.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도모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두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서로 독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의력이 나타나는 일은 쉽지 않다. 왜 그런가?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혜자로 살기는 쉬워도 장자로 살기는 어려운 이유다. 보통은 창의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창의력을 기능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냥 해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창의력은 발휘하려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단련된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지 해보려고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이 튀어나올 수 있는 내면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창의력은 기능적인 범위를 넘어서 인격적인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지적인 상승과 확장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을 장자가 피력하고 난 후, 바로 이어서 한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론이나 지식이나 관념이나 이념의 수행자로 제한될 수 없다. 그것들의 생산자이거나 지배자일 때만 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채우는 진실은 차라리 '모르는 곳'으로 덤벼드는 무모함에 있다. 탐험이고 모험이고 발버둥이고 몸부림이다. 이것을 통괄하여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그래서 문명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발휘하는 용기의 소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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