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이라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지구라는 별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가를 실감할 수 있는 영상이다. 지구도 겨자씨보다 작은 데, 그 안에서 지나가는 시간이며, 공간이며, 생로병사며, 명예며, 치욕이며 하는 것들이 얼마나 또 사소한가. 전라도는 뭐고 경상도는 또 뭔가. 좌파는 뭐고 우파는 또 뭔가. 진보는 뭐고 보수는 또 뭔가. 백인은 뭐고 흑인은 또 뭔가. 철학자면 어떻고 뱃사공이면 또 어떤가. 철학자도 죽고 뱃사공도 죽는 마당에 득도는 뭐고 득도하지 못하는 것은 또 뭔가. 허무하고 허무한 존재들이 허무하고 허무한 짓들을 허무한 줄도 모르고 싸지르다가 속절없이 사라진다.
순간만 살다 죽을 것을 우리는 왜 굳이 애쓰며 사는가. 다 사라질 것을 우리는 왜 잡는가. 결국 다 털고 갈 것을 왜 굳이 배우는가. 허무한 줄 알면서 왜 사는가. 우리의 존재 조건이 허무함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허무와의 투쟁이 아닐까. 허무에 지지 않기 위해서. 허무에 지면 왜 안 되는가. 여기서부터는 질문이 불가능하다. 존재의 가장 궁극적 상태이기 때문에 질문도 거기서부터만 출발할 수 있다. 허무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허무를 관찰하고, 허무와 투쟁한다. 허무와 투쟁하면서 나는 나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확인된다. 자신을 허무에 맏기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관찰하고 투쟁하도록 하는 토대가 허무인 것은 참 모순적이다. 삶을 죽음과 연결해 죽음 쪽에서 삶을 보면 삶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고 충실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삶은 자신의 존재 형식인 허무와 스스로 전선을 형성하면서 허무이면서도 허무가 아닌 것으로 재탄생시킨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원을 함께 경험한다. 자기 존재의 자각,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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