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5.토 09:00~13:30
구서분교 앞 사거리 ←→ 암아교차로
16.0km, 4시간 30분 소요
어젯밤에는 운 좋게 버스를 탈 수 있어 마산으로 와 큰아이와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 한잔에 일정을 마무리했다. 새벽에 목이 말라 깨어서는 물을 조금 마시고 다시 누웠는데 당최 잠이 오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아침잠이 너무 많아 거의 매일 늦잠을 잤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니 이젠 잠이 너무 없어 탈이다.
7시 50분. 63번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에 나왔다. 목적지는 구산초등학교. 시내버스 정류소에 설치된 교통정보 화면엔 실시간으로 버스도착 정보가 올라왔다. 새삼 우리나라가 IT 강국임을 느낀다. 63번은 아직 40분 후에 도착한다. 조금 있으니 버스가 한대 오는데 앞 유리에 구산초등학교가 표시되어 있어 올라탔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어제 그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뭔가 불길한 마음에 검색을 해보니 아뿔싸! 가야 할 곳은 구산초등학교가 아니라 구산초등학교 구서분교다. 두 지점의 거리는? 억수로 멀다. 내려야 하나, 갈등 속에 조금 가다 보니 다행히 어제 걸었던 길을 따라 버스가 가고 있다. 창원시 하수도 사업소가 나오고, 이어서 덕동 삼거리를 지나 유산 삼거리로 들어섰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여기서는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 기사님께 구서분교는 가지 않는지 물으니 그쪽으로는 가지 않는 단다.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내렸다. 유산 삼거리를 지나 오분정도 걸으니 갈비탕이 생각나던 한우미담이 보인다. 어제 어둠이 내리던 시간에 지나간 길을 밝은 햇살을 받으며 걷자니 또 다른 맛이다. 어두운 밤길의 고요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햇살 가득한 아침나절의 유산 고갯길은 더 좋았다. 어제 지나온 길을 다시 40분 정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산초등 구서분교.
마전리에서 다구리로 넘어가는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어젯밤 어둠에 가려 보지 못했던 마전리 바다를 마음껏 감상한다. 언덕길을 올랐다가 돌아 내려가니 제말장군의 묘비가 다구리 앞바다를 지키며 서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군으로 활약한 제말장군은 나르듯 빠르다 하여 "나는 장군"으로 불렸으며 바다에는 이순신, 내륙에는 제말장군이라 하여 왜적이 싸우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장군의 묘를 뒤로하고 도로에서 내려 작은 어촌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밭길을 따라 걷자니 하얗고 발그스레하고 노르스름한 온갖 꽃들이 여행자를 반긴다. 항구로 내려가는 길가에 작은 우물이 있다. 옛날 마을 아낙들이 물동이와 빨래바구니를 이고 나와 우물가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작은 선착장 입구에 다구항이라 적혀 있는 표지판이 보인다. 항구에 수북이 쌓여 있는 커다란 굴껍데기들로 미루어 보아 인근 해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름케 한다.
아침을 먹지 않았기에 요기할 곳이 없나 살펴보니 "김밥, 라면"이라 쓰인 허름한 가게가 보였다. 다가가 문 앞에 서니 부근에서 목재를 손질하던 노인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라면 좀 먹을 수 있는지 물었더니 요새는 장사를 하지 않는 단다. 노인은 작은 정자 같은 것을 만들고 있었는데 아기자기한 것이 참 예쁘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원두막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아주 멋진 손재주를 가지신 분이다.
다구항에서 진동만으로 넘어가는 바닷가 야트막한 산길을 들어섰다. 호젓한 오솔길을 걷자니 놀란 꿩들이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남의 집 조용한 안방에 침입하여 주인을 놀라게 해 쫓아낸 것 같아 못내 미안하다. 고즈넉한 오솔길을 빨리 걸어가는 것이 아까운 마음이 들어 일부러 천천히 걸어가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가끔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아야겠다.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너무 빠르지는 않은지, 너무 느리지는 않은지. 걷느라 못 보고 지나친 것들은 없는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방향을 바꾸어 돌아보면 달리 보인다. 안 보이던 것도 보인다. 그러나 어디 다 볼 수야 있겠는가. 보통은 보이는 것만 볼 수밖에 없다. 다만 내가 보고 있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깨닫고 인정하면 될 일이다. 인생이 그렇고 삶이 그런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조선 정조시대의 문인 유한준이 석농 김광국이라는 사람의 수장품에 붙인 글을 인용한 말이라 한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일에 깊게 빠져 마치 남녀가 사랑하듯 임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어떤 일을 사랑하면 비로소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은 새로운 시각일 것임을 이야기한다. 내가 이 글귀를 처음 본 것은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인간은 아는 것만큼 느낄 뿐이고, 느끼는 만큼 보인다."는 글귀도 있다. 맞는 말이다.
주도마을을 지나 광암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온통 새로 지은 카페와 전원주택들로 즐비하다. 광암항이 있는 진동만은 우리나라 최대의 미더덕 생산지다. 전국 생산량의 약 70%가 진동만 일대에서 양식된다고 한다. 매년 봄철이면 광암항 일대에서는 미더덕을 테마로 한 "창원 진동 미더덕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 났으면 길 이름도 "미더덕로"다.
다구항 라면집 이후 계속해서 밥 먹을 곳이 없나 둘러보며 걸었는데 전부 카페 아니면 횟집들이다. 드디어 광암항에서 "집밥"이라 적혀 있는 곳을 찾았는데 문이 잠겨있다. ㅠㅠ ......!
다행히 잠시 후에 "골목안 추어탕"이라고 손글씨가 쓰인 팻말을 찾았다.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백발의 노인 한 분만이 밑반찬 놓인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옆에 놓인 배낭에 해파랑길 리본이 달려 있어 물으니 해파랑길 종주하고 이어서 남파랑길 종주 중이라 한다. 어차피 서로 혼자이고 말동무하면서 같이 걸어도 되겠는지 물으니 그러자고 한다.
광암항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진동읍내를 지나고, 고현교를 넘어 인곡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길은 다시 바다로 향한다. 길동무가 생기니 걸음걸이는 훨씬 가벼워졌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시간도 잘 지나간다. 68살, 띠동갑의 노형과 걸으며 나름 배려를 한다고 천천히 걷는데 자꾸 앞서 나간다. 따라가서는 천천히 걷고 따라가서는 천천히 걷고를 몇 번 하다 보니 체력이 좋으신 것 같아 나란히 속보로 걷는다.
인곡천 물 위엔 한가한 오리들이 여유롭게 놀고 있다.
방파제를 따라 길게 줄지어선 테트라포 너머로 망망한 바다가 펼쳐져 있고, 멀리 고기잡이 배는 오는지, 가는지...
진동 물재생센터를 지나 언덕 위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쉬면서 음료수를 마시며 양식장이 펼쳐진 진동 앞바다를 굽어본다. 고요한 봄바다다.
언덕을 넘어 고현마을로 들어서니 노변으로 미더덕을 비롯해 멍게, 가리비, 개불 등을 파는 수산물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싱싱한 먹거리들이 많이 보인다.
느긋하게 둘러보다 종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가정집 구조의 횟집 대문 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뭔 일인가 싶어 가보니 이 지역 맛집이란다. "미더덕덮밥"
선두 마을 방파제를 지나 진동면 고현리에서 진전면 율티리로 넘어간다. 율티리로 넘어가는 길 모퉁이에서 진해만(창포만 인 줄 알았는데 지도를 보니 진해만이다) 푸른 바다를 바라본다. 길가에 주저앉아 가만히 낚싯대 하나를 드리우고 싶은 풍경이다. 조선소 공장지대를 지나면 율티리다. 조금 더 걸어서 삼진의거대로와 만났고 곧, 11코스 종점, 12코스 시작점인 암아교차로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