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 인문학 강의 정리
왜 욕망인가?
점잖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한테는 좀 더 이성적인 것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여기서 욕망이라고 할 때 그 욕망의 의미는 내적으로 비밀스럽게 자기한테 느껴지는 삶의 충동, 생명력,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자발성 이런 것을 욕망이라고 한다.
욕망은 자기한테는 힘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있는 자기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가려고 하는 의지, 이것이 모두 욕망과 관련된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욕망은 철저하게 자기만의 것이다. 우리 모두 다 함께 모여있는 곳에서는 욕망이 작동하지 않는다. 집단속에서는 이성이 작동한다. 욕망은 고유한 자기만의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아마도 지식을 증가시키고 경험의 폭을 늘려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자유스러워졌는가?
우리는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행복해졌는가?
우리는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명철해지고, 더 성숙해졌는가?
우리는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눈매가 더 그윽해졌고, 더 성숙해졌는가?
우리는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창의적이 되었고, 더 상상력이 풍부해졌는가?
만약에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한다면 우리에게 지식과 경험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우리는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나지만 더 자유스럽지도 않고, 더 행복하지도 않고, 더 똑똑해진 것 같지도 않고, 더 창의적이지도 않고, 이웃과 더 잘 지내게 된 것 같지도 않고, 가족과도 더 잘 지내게 된 것 같지도 않은가? 왜 그런가? 지식이 정말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지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을 손안에 놓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지식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을 지식한테 넘겨주고 우리가 지식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지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닿아 있다. 지식은 진리인가?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개념(concept)"이라고 한다.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에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 틀에 들어가는 것, 공통적인 것, 공유될 수 있는 것만 남기고 특별한 것, 사적인 것은 여분의 것, 필요 없는 것으로 깎아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개념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자기의 욕망만큼 세계를 잡아서 손에 남겨진 것만 생각으로 저장한 것, 그것이 concept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념은 이 세계에 어떤 대상에 대해서 공통적인 것만 포착해 놓은 것이다. 잡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념을 "파악"한다고 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계는, 우리 개념은 공통의 것만 남겨져있지만 이 세계는 공통의 것으로 남겨지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개념의 형태로 되어 있다. 개념은 출발부터 제한적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어떤 유형을 어떤 특정한 형식으로 잠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지식이 가지는 힘은 무엇이냐? 공통적이다는 것이다. 보편적이다는 모자를 쓴다. 그래서 또, 객관적이다고 한다. 그래서 지식은 힘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신념의 형태로 남겨지면 이념이 되고 가치관이 된다. 이념이나 가치관은 지식의 형태로 존재한다. 개념의 형태로 존재한다.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의 아이디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공통의 것만 뽑아놓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다 인정받는다. 객관적이다. 그래서 힘을 갖는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자신하는가?
아니면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신념과 이념이 자기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시인은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란 시집을 썼다. 그 싯구가 들어있는 구절에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이란 구절이 있다.
우리 어머니한테 주위 사람들이 노래 한곡 하라고 하면, 우리 어머니께서는 노래를 못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인간은, 노래 못하는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다. 노래를 못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내 머릿속에는 노래라면 어떠어떠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는데, 노래라면 어떠어떠한 체계로 되어 있는데 나는 그 체계를 수행하지 못하겠다. 하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 그런 노래를 못한다고 하는 그분이 노래를 할 때가 있다. 언제냐? 혼자 설거지를 할 때다. 혼자 설거지를 할 때 흥얼흥얼 하신다. 혼자 설거지를 할 때 흥얼흥얼 하는 그 노래가 바로 당신이다. 그 흥얼거리는 노래를 계속 붙잡고 늘어지는 일이 상상하는 일이다. 혼자 흥얼거리는 그 노래를 붙잡고 계속 늘어지다가 자기 스스로 음표를 기록해 보는 일, 그것이 "창의적"인 일이다.
왜 사람들은 창의적이지 못 하는가?
왜 상상을 못 하는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지 않고 이미 체계의 노예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체계 속에서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체계 속에서는 이성이 작동한다. 체계 속에서 이성적 존재로 참여하는 한 자기는 행복할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의 내적 동력은 작동될 수가 없다. 체계를 벗어나서, 체계를 이루는 집단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서 온전한 자기를 대면해서 자기를 움직이는 힘, 그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이 긍정되지 않고, 욕망이 자기한테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의 욕망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이 세계에 자기가 없어도 괜찮은가?
이런 질문을 한 번 더 재기해 보자.
당신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가 바라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바람직한 일, 해야 하는 일, 좋은 일을 할 때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고 싶은 일, 바라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체계의 수행자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당신 선택의 몫이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춤춰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https://youtu.be/58xGxpTBTXc?si=VOp6rQUGLdWLeS7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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