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
'우리'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한 인문학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우리'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오직 나의 욕망에 집중하라!
- 최진석 著, 소나무 刊 -
[ 내용 요약 ]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학생의 전공을 문과와 이과로 나뉜다. 그리고 이것이 대부분 대학에서의 전공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문과로 진학해서 배우는 학문과 이과로 진학해서 배우는 학문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과에서 배우는 학문 내용, 대상을 보면 그 안에 사람이 없다. 반면, 문과에서 배우는 학문 내용을 가만히 보자. 그 안에는 사람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 이과에서 배우는 학문의 대상을 가만히 보면,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전부 사라져 버려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에 대하여 배우면 이과이다.
- 그런데 문과에서 배우는 학문의 대상들을 보면,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져 버리면 그것들도 모두 함께 없어져 버리는 것들이다. 그것들에 대하여 배우면 문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왜 뜬금없이 문과 이과 이야기인가? 이 책의 제목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 한자 '리(理)'라는 글자를 보자. 옥돌에는 무늬가 있다. 즉, 결이 있는 것이다. 옥돌에 새겨진 무늬를 '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리'는 인간이 그려 넣은 것인가? 자연이 그린 것인가? 자연이 그린 것이다.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이 그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있는 것들에 대한 연구, 그것이 바로 이과 학문이다.
- 한편 '문( 文)'이라는 글자를 보자. '문'은 원래 무늬라는 뜻이다. 우리 옷에 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것을 '문', 즉 문양이라고 한다. 무늬는 누가 그리는가? 인간이 그린다. 그럼 인문(人文)은 무엇인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말이다.
인간은 그냥 들쑥날쑥 사는 게 아니다. 하나의 큰 무늬, 커다란 결 위에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부 다르고 개성이 있지만 이 다른 개성 모두 다 한 결, 한 무늬 속에서 움직이는 다름일 뿐이다.
이렇게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혹은 '결'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인간의 동선'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당연히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 된다. 지금의 학문 분류에 따라서 말할 때, 인문학에는 대표적으로 문학과 사학 그리고 철학이라는 세 분야가 포함된다. 줄여서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한다.
철학이든 사학이든 문학이든 인문학으로서의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을 알려주려고 하는 학문들이다.
-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여 감동의 형식으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문학(文學)이다.
- 사건의 시간적인 계기를 재료로 삼아 인간이 그리는 결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면 사학(史學)이 된다.
- 명증한 범주와 개념들로 세계를 포착하여 그것들의 관계 및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의 동선을 알게 해 주면 바로 철학(哲學)이 되는 것이다.
무늬의 의미가 무엇인가? 고대인은 고대인의 무늬를 그린다. 근대인과 현대인은 각각 근대적 혹은 현대적 무늬를 그린다. 인간은 이런 큰 틀의 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인문(人文)'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무늬' 혹은 '인간의 결'이다. 쉽게 '인간의 동선'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과거는 ' 인간의 동선' 뒤쪽이고 미래는 앞쪽 방향일 뿐이다. 그러면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이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을 가늠하지 않고도 가능할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을 생각해 보자. 바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독립적'으로 알아내기 위해서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다.
그럼 관건은 무엇인가? 도대체 인문적 통찰을 하는 관건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일'이다.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뚫고 이 세계에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을 얻는 중요한 기반이다.
하나의 국가에서 인문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선진국으로 진입할 동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어느 사회나 초기 단계에서는 대개 정치학과 법학이 중심적인 기능을 한다. 그런데 사회가 좀 발전하고 나면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등의 학문이 주도적 기능을 한다.
그다음에 사회사 좀 더 발전하면 철학이나 심리학 같은 인문학이 중심학문으로 등장한다. 이보다 더 발전한 나라에서는 고고학이나 인류학이 주요 학문으로 부상한다.
고고학이나 인류학을 발전시켰던 나라들을 보면 대개 제국을 꿈꿨던 나라들이다. 인간을 전체적인 의미에서 제국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관리할 수 있어야 하기 따문이었다. 나라가 제국을 꿈꿀 정도가 되어야 고고학이나 인류학의 범위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철학 등과 같은 인문학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문명과 인간의 흐름을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미래를 위한 비전과 메시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다른 나라에서 정한 비전이나 메시지를 학습해서 그대로 수행하거나 모방하는 역할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는 메시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 선택, 판단해야 하는 정도로 나라의 수준이 올라서야 인문학이 중심적인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은 어디인가? 행복이다! 행복은 갈등 속에 휩싸이지 않고 더욱 아량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인도하여 주며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넘치게 해 준다.
이념과 가치관과 신념의 체계를 벗어던지고 인문적 통찰의 길로 진입하는 순간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이 드러난다. 순수한 자기 욕망이 지식에 매몰되지 않고 그 지식을 딛고 지혜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것이 바로 욕망이다. 자기 자신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줄 수 있는 의지, 생명력, 동력, 충동이다.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개념의 구조물인 이념에 지배되지 않고, 피가 통하고 몸이 살아 움직이는 활동성을 위주로 한다는 것이다. 활동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욕망이며 덕이며 개성이며 기질이며 감각이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이념이나 가치관 혹은 신념의 대행자가 아니라, 비로소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인문학의 고찰을 통해 인간으로 산다는 것, 독립적으로 산다는 것,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 덕을 가지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꼭 한번 읽어 봐야 할 책이다.
나는 지금, 자신만의 무늬를 그리고 있는가?
-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 좋을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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