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2일
아침 공양이 끝나자 방부를 드렸다. 장삼을 입고 어간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한다.
본사와 사승 그리고 하안거 처소를 밝히고 법명을 알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선착(先着) 스님들은 환영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부장불영(不長不迎) 할 뿐이다.
법계의 순에 따라 좌석의 차서가 정해진다. 비구계를 받은 나는 비구석 중 연령순에 따라 자리가 주어졌다. 내가 좌정하자 입승스님이 공사를 발의했다.
공사란 절에서 행해지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일종의 회의를 말함인데, 여기에서 의결되는 사항은 여하한 상황이나 여건하에서도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적게는 울력으로부터 크게는 산문출송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공사를 통하여 채택되고 결정된다.
본래 절 생활이란 주객이 없고, 자타가 인정되지 않고, 다만 우리들이라는 공동생활만이 강요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질서와 법도의 준수가 요구되며 개인행동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활의 외양은 극히 공산적이지만 내용은 극히 자주적이라고나 할까.
공사의 내용은 김장 울력이다. 반대의견이 있을 수 없다. 겨울을 지낼 스님들이니 김장을 속결하자는 의견만 구구했다.
오늘 아침 공양 대중은 스물세 명이다. 원주스님과 젊고 건장한 두 스님이 양념 구입차 강릉으로 떠나고 나머지 스님들은 무, 배추를 뽑은 뒤 각자의 소질대로 일에 열중했다. 무 구덩이를 파고 배추를 묻기 위해 골을 파는 일은 주로 소장스님들이 하고, 시래기를 가리고 엮는 일은 노장스님들이 맡고, 배추를 절이고 무를 씻는 일은 장년스님들이 담당했다.
배추 뿌리와 삶은 감자로 사이참을 먹으면서 부지런히들 했다. 해는 짧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차가웠다. 오대산이고 더구나 상원사 도량의 10월이니까 그럴 수밖에.
김장이 끝난 후 조실스님은 버린 시래기 속에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김장에서 손을 턴 스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조실스님은 최악의 경우 최소한도로 먹을 수 있는 시래기를 다시 골라 엮고 있었다. 나도 조실스님을 도와 시래기를 뒤졌다. 조실스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옛날 어느 도인이 주석하고 계시는 토굴을 찾아 두 납자가 발길을 재촉했었다오. 그런데 그 토굴에서 십리쯤 떨어진 개울을 건너려고 할 때 이런 시래기 잎이 하나 떠내려 오더래요. 그러자 두 납자는 발길을 멈추고 이렇게 중얼거리더래요. ‘흥, 도인은 무슨 도인, 시래기도 간수 못 하는 주제인데 도는 어떻게 간수하겠어. 공연히 미투리만 닳게 했구료.’ 하면서 두 납자가 발길을 되돌려 걷자 ‘스님들, 스님들, 저 시래기 좀 붙잡아 주고 가오. 늙은이가 시래기를 놓쳐 십 리를 쫓아오는 길이라오.’ 두 납자가 돌아보니 노장스님이 개울을 따라 시래기를 쫓아 내려오고 있더래요. 시래기를 붙잡은 두 납자의 토굴을 향한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겠지요."
과묵한 조실스님이 계속해서 시래기를 엮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식물은 아껴야만 하겠지요. 식물로 되기까지 인간이 주어야 했던 시간과 노동을 무시해 버릴 순 없잖아요. 하물며 남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식물이야 더욱 아껴야 하겠지요.”
나는 침묵하면서 시래기를 뒤적일 뿐이었다. 진리 앞에서 군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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