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25일
선방에 전래되는 생활규범이 있으니 그것은 두량 족난 복8분(頭凉 足煖 腹八分)이다.(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듯하게, 배는 만복(滿腹) 에서 이분(二分)이 모자라는 팔분) 의식주의 간소한 생활을 표현한 극치이다.
선방에는 이불이 없다. 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으로 발만 덮고 잠을 잔다. 그래서 선객의 요품(要品)중의 하나가 바로 방석이다. 옮겨 다닐 때에는 바랑에 넣어가지고 다닌다.
선방의 하루 급식량은 주식이 일인당 세 홉이다. 아침에는 조죽(朝粥)이라 하여 죽을 먹고 점심에는 오공(午供)이라 하여 쌀밥을 먹고 저녁에는 약석(藥石)이라 하여 잡곡밥을 약간 먹는다. 부식은 채소류가 위주고 가끔 특식으로 두부와 김과 미역을 보름달 보듯 맛볼 수있다.
선객이 일 년에 소비하는 물적인 소요량은 다음과 같다.
주식비 3홉 365일= 1,095홉
(1,095홈x15원=16,425원)
부식 및 잡곡은 자급자족
승복(僧服) 광목 20마(20마 x 50원=1,000원)
내복(1,500원)
신발 고무신 2족(2족 x 120원=240원)
합계 2만원이면 족하다.
그래서 선객은 모름지기 '삼부족(三不足)'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식부족(食不足), 의부족(衣不足), 수부족(睡不足)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추태는 갖가지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되는데 욕망에서 해방은 되지 못했으나 외면만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세속의 70 노파가 산문(山門)의 홍안납자(紅顔衲子)에게 먼저 합장하고 고개 숙이는가 보다.
그러나 잘 따지고 보면 납자는 철저하게 욕망의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한다. 세속인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 낼 뿐더러 생사문제까지 의탁해 버린 부처가 되겠다는 대욕(大欲)에 사로잠혀 심산유곡을 배회하면서, 면벽불(面壁佛)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膏血)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무욕(無欲)은 대욕(大欲)때문일까. 선객은 스스로가 인간은 끝내 건성하지 않으면 안 될 고집(苦集, 고통의 덩어리)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고의 땅 위에, 고의 집을 짓고, 고로써 울타리를 치고, 고의 옷을 입고, 고를 먹고, 고의 명에를 쓰고, 고에 포용된 채, 고의 조임을 받아가면서도 고를 넘어서려는 의지만을 붙들고 살아간다.
만약 이 의지를 놓친다면 그때는 생의 모독자가 되고 배반자가 된 채 암흑의 종말을 고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운명적으로 붙들 수밖에 없다.
선객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이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와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사실이지만 운명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요,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 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하고 거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숙명의 소산이라면 자라서 갑부가 된 것은 운명의 소조이다.
내가 이나 벼룩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숙명의 소치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불교에 귀의하고 정진 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운명의 소조에서다.
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 숙명은 자기 부재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숙명적인 것을 피하려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고집의 표상 같은 누더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선객이야말로 견성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내 운명은 타기(唾棄)될 것이 아니라 파지(把持)되어야 함은 선객의 금욕생활이 극한에 이를수록 절감되는 상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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