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나는... 누구인가? 2024. 9. 14. 20:18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著, 해냄 刊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몽상의 역사이다. 인류가 성취한 모든 이상은 한때 누군가의 몽상이었다. 노예 해방, 보통선거, 흑인 해방, 민주주의, 공교육, 사회복지, 무상급식 등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누리는 거의 모든 이념과 제도는 한때 이상주의자들이 꿈꾸던 비현실적 몽상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끝없는 경쟁으로 내모는 '경쟁 교육'을 넘어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존엄을 자각하고 타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존엄 교육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아니다. 혼자 꾸는 꿈은 몽상이지만, 모두가 함께 꾸면, 꿈은 현실이 된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는 폭군'이라고 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경쟁 교육은 야만'이라고 했다. 이제 능력주의 경쟁 교육을 끝내야 한다. 이제 폭군과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이제 이 야만적 폭군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구해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교사가 행복하고, 학부모가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가 성숙한 민주사회, 정의로운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넬슨 만델라는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그 사회의 영혼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영혼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그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이 개성을 기르고 자유를 누리도록 무엇을 돕고 있는가. 그들이 세계의 고통과 억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연대하는 세계시민으로 자라도록 이끌고 있는가. 그들이 정의와 평등의 감수성을 갖도록 교육하고 있는가. 요컨대 우리 아이들을 존엄한 인간, 성숙한 시민, 개성적인 자유인으로 기르고 있는가.

우리 국민 열 명 중 여덟 명이 경쟁 교육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국가가, 아니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서 경쟁 교육을 끝내고, 학대받고 유린당하는 우리 아이들을 이 지극한 고통에서 구해내야 한다. 불행한 아이가, 경쟁에 상처받은 아이가, 억압당한 아이가, 생각 없는 아이가 만들어갈 우리 사회의 미래가 두렵다. 아이들의 불행은 곧 사회의 예약된 불행이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구하면 그 아이들이 대 한민국을 구할 것이다.

"오로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져 있다."

괴테의《친화력》에 나오는 이 말에 특별히 주목한 이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극심한 정치적 대립과 사상적 혼돈 속에서《역사철학 테제》를 쓰며 이 말을 인
용한다. 오늘, 이 환멀의 시대에, 왜 자꾸 이 말이 떠오를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깜깜한 절망의 시대, 희망은, 오직 희망을 잃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