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노자와 장자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로

나는... 누구인가? 2024. 5. 21. 16:05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괜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말을 나누고도 뭔가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이 있다. 여럿이 모여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지막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해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듣고 나서 죄다 흘려 보내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은 다 다르다. 같은 내용에 각자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할까? 그 이유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에 분개하면서 정작자신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기차를 탔을 때 전화가 오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하무인 격으로 앉은자리에서 통화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밖에서는 '민주'를 외지지만, 집에 오면 독재자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을 때 질문이 마구 샘솟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내용을 수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전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들을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끌고 온 차들로 주번 도로의 교통 상황은 엉망이 된다. 도로 양쪽에 불법주차를 하는 바람에 상당한 거리의 차도가 극심하게 좁아져서 오가는 데에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교회에 나와 이웃 사람에 관한 설교를 듣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일을 하느라 이웃에 큰 폐를 끼친다. 이웃을 사랑하자는 그 다짐과 이웃에 폐를 끼치는 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제대로 사는 일. 힘들고 불편하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을 비판하기는 쉽고, 자신이 직접 쓰레기를 품는 일은 힘들다.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편리를 위해 차를 끌고 오기는 쉽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하다. 이웃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정도의 불편과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일회용 물건을 쓰기는 쉽지만 그것을 쓰지 않으려면 자신만의 컵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기능적인 일은 쉽다.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고 질문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인격적 활동에 속한다. 당연히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따라 하기'는 쉽고 창의가 어려운 이치다. 사람은 쉬운 쪽으로 쉽게 기울게 되어 있어 질적인 상승이 더디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다. 불편의 최고 단계인 '장애'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장애'를 내면화하여 그것과 일치되는 경험을 유도한다. 불편과 장애와 한 몸이 되는 단계에서 인간의 본바탕이 구출되곤 한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장애'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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