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매천 황현은 야인의 자격으로 쓴 비사, <매천야록>을 남겼다. 고종 1년(1864)부터 융희 4년(1910)까지의 47년을 담았다. 마지막 문장에서 비통함은 극에 이른다. "나라가 망했다. 전 진사 황현, 약을 먹고 죽다.(韓亡 前進士黃玹 仰藥死之)" 경술국치 바로 그날이다. 그가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 한편이 이 비참한 풍경과 겹친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누나.
무궁화 피는 우리나라는 이미 망하고 말았다.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지난날 돌아보니
세상에 글자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이렇게 보면 매천은 글자(문자) 아는 사람, 즉 식자인(識字人) 노릇을 하느라 스스로 죽었다. 대체 글자니 문자니 하는 것이 무엇이어서 매천은 그것을 아는 사람 노릇을 하느라 목숨까지 내놓았을까? 문자의 가치가 목숨에까지 올라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존재 의의와 붙어 있다는 말 아닌가. 문자를 잘 못 다루면 독립도 지키지 못하고, 문자를 아는 사람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하겠다. 그럼 문자라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높이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자연이리는 세계에 내려와 무형, 유형의 무엇인가를 만들고 제조하고 생산하여 번화를 야기한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제조하고 생산하는 일을 '그린다(文)'라는 말로 포괄한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그려서(文化) 변화를 야기하는(化) 존재, 즉 문화(文化)적 존재다. 인간이 누리는 문명은 모두 제작하고 생산하는 문화적 활동의 결과다. 인간이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라면 문화적 활동, 즉 무엇인가를 제작하고 생산하여 변화를 야기하는 일의 효율성이 생존 능력을 좌우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문화력의 증진에 맞춰진다. 문화력의 증진이 바로 생존의 질과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화력이 높은 나라는 앞서고, 문화력이 뒤처진 나라는 뒤따른다.
문화력에서는 '상징'하는 능력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 숫자를 예로 들어 보자. 숫자는 상징의 한 형태다. '2'를 보자. 구체적인 세계에 '2'라는 상징 기호에 해당하는 경우는 무한대로 많다. 무한대로 많은 그 경우들을 그냥 하나의 숫자 '2'로 모두 압축할 수 있다. 얼마나 편리한가. 숫자를 아는 사람은 무한대의 다양한 '2'의 모든 경우를 하나의 숫자로 압축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 다양한 경우를 모두 형편에 따라 열거해야 한다. 이 편리함이 효율성을 보장한다.
더하기 빼기만 할 출 아는 사람과 3차 방정식을 풀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둘 사이에는 상징의 높이가 다르다. 더하기 빼기의 높이보다 3차 방정식이 높다. 더 높으면 더 큰 통제력을 가진다. 더 큰 통제력을 가지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상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통제력과 영향력은 더 커진다. 예술은 예능에 비해 더 추상화되었다. 당연히 예술의 높이가 예능의 높이보다 높다. 그래서 예능의 높이에 있는 사람보다는 예술의 높이에 있는 사람이 더 큰 힘을 갖는다. 기능은 기술보다 추상화의 정도가 낮다. 기능은 기술보다 힘이 약하고, 기술은 기능보다 강하다. 이처럼 문화력은 결국 능력 혹은 힘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숫자'를 구성하는 내용이 아니다. 숫자를 생상하고 사용하는 바로 그 높이다. 문자는 문화 활동의 정점이자 문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며 효율적인 장치다. 문자는 문화력의 시원이자 정점이다. 문자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문자가 함축하는 내용을 살피는 일이 아니라 문자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높이에 도달하는 일이다. 문자나 숫자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도 그것이 상징하는 '높이'의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문화력이 생존 능력이나 높이를 결정한다. 여기서 사람이나 국가가 갈라진다. 누군가는 문화적 활동으로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문화적 활동으로 야기된 변화를 수용한다.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은 아직 열리지 않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바로 창의적 활동이다. 문화적 활동이라면 당연히 창의적 활동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앞의 말을 달리 표현하면, 누군가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세상을 새롭게 여는데, 누군가는 창의적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한다고 할 수 있다. 독립적인가, 종속적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결정된다. 자유와 부자유가 갈라지는 곳도 바로 여기다. 문자를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정점의 높이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이라는 말과 같다. 매천은 식자인(識字人)으로 살기 어럽다는 말로 자신과 조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이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밝힌다. 그는 점점 독립과 자유를 상실하고 종속성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조국과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특별한 높이에 도달했던 한 지성인으로 하여금 죽은으로 '자존'을 지키게 한 이유다. 매천은 문자를 기능적인 도구로 이해하여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일에 빠져 있던 학자가 아니다. 그는 문자가 인간 정신의 승화이자 문명의 정점에서 삶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점을 철저히 인식한 매우 높은 자리에 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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