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노자와 장자

개념화

나는... 누구인가? 2024. 6. 20. 07:59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문자가 문화적인 높이에서 작동활 때 나오는 중요한 점은 개념 제조 능력, 즉 '개념화' 능력이다. 문자적인 높이에 있는 사람은 '개념화'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개념화'의 결과인 '개념'을 수용한다. '개념화'는 인간이 세계를 전술적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다루는 일이다. '개념화'는 바로 세계를 장악하는 일이다. 부연하면,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고, 그 개념을 매개로 새롭게 판을 짠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념을 제조하는 일은 창의적인 활동의 대표적인 한 유형이다. 이것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해 나가는 매우 진보적인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와 달리 '개념'을 수입한다는 말은 개념 제조자가 벌인 판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그 의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의 주도권은 일본에 있었다. 과학, 철학, 세포, 해부 등등 근대를 상징하는 거의 모든 개념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개념화'를 하면 앞서고, '개념화'의 결과인 '개념'을 수용하기만 하면 뒤따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남이 이미 정해놓은 명제를 분석하는 데 열심인 자신을 마치 명제를 만든 사람과 동격인 것으로 착각하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미 있는 것을 따르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활동의 대부분을 채우며, 이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이미 있는 것에 협조하거나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얻는 삶은 종속적인 삶의 전형적인 형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문자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외부의 개념들을 따라 우리 삶을 꾸리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새로 지은 건물이나 아파트 이름은 죄다 외국 말이다. 외
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라틴어로 짓기도 한다. 기본적인 소통도 안 되는 말들을 걸어놓고, 서로 바라보며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로 채워지는 삶이 어떻게 독립적일 수 있겠는가. 삶의 현장과 그 현장을 다루는 상징이 분리된 삶이라면 거기서는 어떤 문화적 생산성도 일어날 수 없다. 삶과 개념이 분리된 상황에서는 삶의 현장을 자신의 경험으로 구체화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가요에
영어 몇 소절은 반드시 들어간다. 가수들 이름도 외래어 일색이다. 일본의 '오타쿠'는 그대로 우리말로 '덕후'가 된다. 외부의 개념화 결과를 그대로 내면화한다. 독립적으로 소화해서 최소한의 이차적 개념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창의적 결과가 터져 나오지 않는 것, 시민 의식이 약한 것, 지식과 이론을 수용만 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것 등등이 모두 '문자'를 대하는 이런 태도들과 따로 있지 않다. 매천은 문자를 아는 사람, 즉 식자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목숨과 바꿨다.

문자의 높이는 따라 하기를 넘어선다. 따라 하기로 여기까지 온 우리는 '식자인'의 품위를 회복해야 한다. 비록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문자'적 독립의 길을 건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개념'이 아니라 '개념화 '다. 자신의 문자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전략화 한다. 이것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장자](추수) 편에 나오는 얘기다. 수릉에 사는 젊은
이가 국경을 넘어 조나라의 서울 한단으로 걸음걸이를 배우러 갔다. 그 시절엔 그곳의 걸음걸이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고유한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나중에는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 하기로 살면, 당당하게 서서 사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은 정작 기는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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