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55

선방일기 / 소임

1973년 10월 15일삼동결제(三冬結制)에 임하는 대중이 36명이다. 조공(아침공양)이 끝나자 공사가 열렸고 결제방이 짜여졌다. 결제방이란 결제 기간에 각자가 맡은 소임이다.36명의 대중을 소임별로 적어보면조실(祖室) 1명 - 산문(山門)의 총사격(總師格)으 로 선리(禪理) 강화 및 참선지도유나(維那) 1명 - 포살(戒行과 律儀) 담당병법(秉法) 1명 - 제반시식(諸般施食) 담당입승(立繩) 1명 - 대중(大衆) 통솔주지(住持) 1명 - 사무총괄(寺務總括)원주(院主) 1명 - 사중(寺中) 살림살이 담당지전(知殿) 3명 - 전각의 불공(佛供) 담당지객(知客) 1명 - 손님 안내시자(侍者) 2명 - 조실 및 주지 시봉다각(茶角) 2명 - 차(茶) 담당명등(明燈)..

선방일기 / 결제

1973년 10월 14일결제(結制)를 하루 앞둔 날이다. 결제란 불가용어로서 안거(安居)가 시작되는 날을 말하고, 안거가 끝나는 날을 해제(解制)라고 한다.안거란 일 년 네 철 중에서 여름과 겨울철에 산문출입을 금하고 수도에 전력함을 말한다. 하안거는 4월 15일~7월 15일이고 동안거는 10월 15일~1월 15일이다. 흔히 여름과 겨울은 공부철이라 하고, 봄과 가을은 산철이라 하는데 공부철에는 출입이 엄금되고, 산철에는 출입이 자유롭다. 그래서 결 제를 위한 준비는 산철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선방생활과 병영생활은 피상적인 면에서 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출진을 앞둔 임전태세의 점검이 무인(武人)의 소치라면 결제에 임하기 위한 제반 준비는 선객이 할 일이다. 선방에 입방하면 침식은 제공받지만 의류나 그 ..

선방일기 / 산사의 겨울채비

1973년 10월 5일원주스님의 지휘로 메주 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중생활이고 보니 언제나 분업은 철저히 시행된다. 콩을 씻어 삶는 것으로부터 방앗간을 거쳐 메주가 되어 천장에 매달릴 때까지의 작업과정에서 대중 전체의 손이 분업 형식으로 거치게 마련이다. 입이 많으니 메주의 양도 많지만 손도 많으니 메주도 쉽게 천장에 매달렸다. 스무 말들이 장독에는 수년을 묵었다는 간장이 새까맣다 못해 파랗고 흰빛까지 드러내 보이면서 꽉 차 있지만 어느 때 어떤 종류의 손님이 얼마나 많이 모여 와서 간장을 먹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나 풍부히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원주스님의 지론이다.동안거를 작정한 선방에서 겨울을 지내자면 김장과 메주 작업을 거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선객들의 불문율로 되어 있는 관습이다. 김장과 메주 ..

선방일기 / 김장울력

1975년 10월 2일아침 공양이 끝나자 방부를 드렸다. 장삼을 입고 어간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한다.본사와 사승 그리고 하안거 처소를 밝히고 법명을 알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선착(先着) 스님들은 환영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부장불영(不長不迎) 할 뿐이다.법계의 순에 따라 좌석의 차서가 정해진다. 비구계를 받은 나는 비구석 중 연령순에 따라 자리가 주어졌다. 내가 좌정하자 입승스님이 공사를 발의했다.공사란 절에서 행해지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일종의 회의를 말함인데, 여기에서 의결되는 사항은 여하한 상황이나 여건하에서도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적게는 울력으로부터 크게는 산문출송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공사를 통하여 채택되고 결정된다.본래 절 생활이란 주객이 없고, 자타가 인정되지 않고,..

선방일기 / 상원사행

1973년 10월 1일나는 오대산의 품에 안겨 상원사 선방을 향해 걸어 나아갔다. 지나간 전쟁 중 초토작전으로 회진(灰塵)되어 황량하고 처연하기 그지없는 월정사에 잠깐 발을 멈추었다. 1천3백여 년의 풍우에 시달린 구층석탑의 탑신에 매달린 풍경소리에 감회가 수수롭다.탑전에 비스듬히 자리 잡은 반가사유보살상이 후학납자를 반기는 듯 미소를 지우질 않는다.수복 후에 세워진 건물이 눈에 띈다. 무쇠처럼 단단하여 쨍그렁거리던 선와(鮮瓦)는 어디로 가고 목어 기둥이 웬일이며, 열두 폭 문살문은 어디로 가고 영창에 유리문이 웬일인가. 당대의 거찰이 이다지도 초라해지다니. 그러나 불에 그을린 섬돌을 다시 찾아 어루만지면서 복원의 역사를 면면히 계속하고 있는 원력 스님들을 대하니 고개가 숙여지면서 선방을 향한 걸음이 가..

선방일기 / 지허스님 지음

[知虛스님] 1957~1958년 사이 출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에 의하면 서울대를 졸업하고 탄허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고 한다. 1962년~1963년 사이 1년간 강원도 정선 정암사에서 20여리 떨어진 토굴에서 수행했고 이때의 기록이 대한불교에 연재된 적이 있다. 1975년 입적했다는 진술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선방일기]는 1973년 월간 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모두 2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미 1993년과 2000년 각각 단행본으 로 출간된 적이 있다. '선방일기'는 1970년대를 전후한 선방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어 그동안 좋은 '사료'의 역할을 해왔으며 후학들에게도 큰 경책이 되었다. 일반인들의 호응도 대단해 이미 수만 부가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쓴 ..

애태타(哀駾它)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춘추전국시대 위(衛)나라에 슬픔을 자아낼 정도로 못 생겼다는 뜻의 애태타(哀駾它)라는 추남이 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남자들은 그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한다. 그는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고 늘 다른 이에게 동조할 뿐이었다.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쌓아둔 재산으로 남의 배를 채워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흉한 몰골은 세상을 감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지식도 사방 먼 곳까지 미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남녀가 그를 따르려 모여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것을 온전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

발 하나 잘린 왕태(王駘)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춘추전국시데, 노(魯)나라에 형벌을 받아 발 하나가 잘린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다. 덕망이 높아서 따르는 제자가 공자만큼이나 많을 정도였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묻는다. "왕태는 외발이 장애인입니다. 그런데도 따르는 제자 수가 선생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도 없고 토론도 하지 않는데, 빈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무언가를 가득 얻고 돌아간다고들 합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분은 성인이시다. 나도 찾아뵈려 했지만 꾸물대다가 아직 뵙지 못했다. 나도 그분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는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노나라 사람뿐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를 따르려..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로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著, 북루덴스 刊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괜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말을 나누고도 뭔가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이 있다. 여럿이 모여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지막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해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듣고 나서 죄다 흘려 보내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은 다 다르다. 같은 내용에 각자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할까? 그 이유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

밀레니얼 세대보다 중요한 세대

2030 축의 전환 / 마우로 기옌 지음 오늘날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대는 약 23억 명에 달하는 밀레니얼 세대, 그러니까 1980~2000년에 태어난 세대다. 기업과 정치가들 모두가 그들의 마음과 주머니 속의 돈, 그리고 투표권을 원한다.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 스댄리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는 현재 "경제활동에 가장 중요한 연령대"다. 이제부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고 정착을 위해 돈을 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이전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연령대의 사람들도 각기 삶의 형태와 규모가 다르다. 누군가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다. 누군가는 부자지만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버겁다. 누군가는 소비 자체를 미덕으로 여기고 누군가..

인문학 2024.05.13